윤재근 칼럼-난세의 세 인간

입력 1997-03-18 00:00:00

"〈한양대교수·국문학〉"

한 비뇨기과 의사가 설치해 놓은 '몰래 카메라'가 대통령의 차남이 전화를 거는 현장을 잡아 다음과 같이 똑똑하게 들려주었다. "여보세요. 저 김현철인데요. 계세요?…우리 정무수석하고 상의를 좀 했단 말이에요" 대통령의 아들이라고 해서 대통령밖에 할 수 없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는사실이 정말 어이없게 했다.

*'차남'의 몰래카메라

녹취내용을 들어 보면 김현철씨는 공공기관의 정보를 사유(私有)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국민을 위해 공적(公的)으로 활용되어야 할 정부기관의 정보를 사리(私利)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용서할수 없는 월권(越權)이다.

대통령 차남이 월권을 자행했음이 분명해졌다. 월권은 위법(違法)이다.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는것이 상식이다. 대통령의 아들이라고 해서 상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권력 안에서 월권을 자행 할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법(無法)이다. 문제의 녹화테이프를 보는 순간 무법이 저런 것이란 확신이 섰다.

물론 그 테이프는 추잡한 저의(底意)에서 만들어진 것이겠지만 대통령 아들이 월권을 자행한 현장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어 이제 더는 적당히 얼버무릴 수 없게 만들어 주었다. 숨기고 감춘 것은반드시 드러난다고 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숨길 수 없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란 무엇인가.민심(民心)을 말한다.

*오늘의 우리 모습들

그리고 문제의 테이프에 연계된 세 인간은 난세(亂世)를 만들어내는 인간형(人間型)을 살펴보게한다. '권력을 업고 월권하는 인간' '약점을 미끼로 덫 놓는 인간' '시치미 떼고 호박씨 까는 인간' 등이 문제의 테이프에 세 갈래 인간형으로 너절하게 걸려 있다. 어쩌면 이런 인간형이 우리모두의 자화상일는지 몰라 오금이 저리고 부끄럽기짝이 없다.

가을이 있는 줄 모르고 질러대는 매미처럼 권력이 무상한 줄 몰랐다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메뚜기 한철이 아니냐고 변명하지 말라. 세상을 얕보고 건방을 떨면 언제든 서리가 내리게 되는 법이다. 지금 김현철씨는 민심의 된서리를 맞아 면목없게 됐다.

터를 잡고 떡밥을 풀어 물고기를 유인하는 강태공처럼 약점을 잡아 뒷덜미를 나꿔채 한몫 보려는짓거리는 엉큼하기 짝이 없다. 엉큼하면 끝이 험하게 마련이다. 떳떳하다고 강변하는 박경식씨는등치고 간 내먹는 짓을 도모하려 했다는 오해를 풀기 어렵게 돼 망측하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생각해 남의 집 매를 훔쳐 매사냥을 해서는 안된다. 시치미를 뗐다는 심증이 가면 콩을 콩이라 해도 믿지 않고 의심을 받는다. 테이프를 빌렸든 훔쳤든 상관없다. 덫에 걸린 사냥감을 야산에 파묻은 짓을 좋게 해석할 수는 없다. 국민의 알 권리라고 주장하지만 양대석씨는 시치미를 떼다 발목을 잡혀 메스껍다.

*면목없는 자괴감만

권력을 업고 월권하면 권력형 비리가 생긴다. 약점을 미끼로 덫 놓는 짓을 하면 세상이 소매치기소굴처럼 되기 쉽다. 시치미를 떼고 호박씨 까는 짓거리는 악이 선을 쫓는 음모를 꾸며도 막을수 없게 된다. 이런 짓거리들 때문에 난세(亂世)가 판을 치고 있다. 이 판국에 나는 어느 인간형에 속하는지 자괴(自愧)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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