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사회' 만들자 (8)-흔들리는 가정

입력 1997-03-07 15:03:00

"좁아진 '아버지 자리' 찾아주자"

존속살해가 9일마다 1회, 자식이 부모를 때린 일이 하루 3.2회, 부모가 내다버린 자식이 하루 9명.지난 95년 사법연수원 강지원(姜智遠)교수가 공개한 한국 가정의 위기상황을 알리는 범죄시계(Crime Clock)이다.

2년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도 이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아갔을 것으로 희망적 기대를 하진 않는다.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정 파탄을 지켜보며 대책 없는 한숨만 짓고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비윤리적 파탄을 접하면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또!"라는 한마디 뿐이다.

지난 달 20일엔 부산에서 치매를 앓고 있던 80대 시어머니를 집안 연탄창고에 1주일간 가둬 끝내숨지게 한 비정한 며느리가 경찰에 구속됐다. 남편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병사로 처리될 뻔했던 이 사건은 연탄창고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수상하게 여긴 이웃들의 진정으로 추한 전모가 드러났다.

지난 달 23일 서울에선 취직 할 생각은 않고 놀고 있다며 꾸짖는 아버지를 10대 아들이 살해한일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경기도 부천에선 중학생 딸이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며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목 졸라 숨지게 했다.

가정해체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일탈로 인해 빚어지는 현상이다. 이같은 한 가정의 몰락은 구성원 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직·간접으로 큰 피해를 끼친다.4일 새벽 경기도 부천에서 술에 취한 채 부부싸움을 하던 40대 남자가 홧김에 LPG가스통을 열고불을 붙이는 바람에 9가구가 사는 다세대주택이 무너져 이웃 3명이 숨지고 10여명이 중·경상을입었다.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며 우리는 이 시대 아버지의 위치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위에서 제시된 사례들은 아버지의 자리가 굳건했다면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언제나 강하고 믿음직한 모습으로 남아있기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없다. 남자는 강하지만 아버지나 남편의 모습은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권위 회복을 위해 발버둥치는 가장의 모습은 애처롭다. 경기불황과 명예퇴직의 칼날이 나날이 목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걸음 걸음은 마치 살얼음을 걷는 것 마냥위태롭기만 하다.

아버지가 자식과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지 얼마나 됐나. '온라인(On-Line)'시대는 아버지의 손에서 경제력이란 이름의 마지막 카드마저 빼앗아갔다. 월급 봉투를 건네 받으며 "수고했다"며 미소짓는 아내의 모습은 간데 없고, 아이들도 아버지의 용돈을 기대하지 않는다.실추된 가장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아버지의 몸부림은 때때로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는다. 가장대표적인 예가 가정 폭력. 아내에 대한 폭력과 아동학대로 비화된다. 가정문제를 다루는 사회단체나 기관마다 앞다투어 가정 폭력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대동소이했다.여성 가운데 45%% 가량이 남편에게서 구타당한 경험이 있으며, 남성의 50%% 이상이 아내를 때린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매맞는 여성 가운데 80%% 이상은 한 달에 1회 이상 매를 맞았다. 주먹이나 발로 때리고 차거나 목을 조르는 경우는 50%% 가량, 흉기 사용 약 40%%, 담뱃불로 지지는 경우도 약 5%%에 이르렀다.

차츰 설 땅이 좁아지는 것을 보며 불안을 느끼는 아버지에 반해 어머니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있다. 직장을 가진 겸업주부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남편에 의지하는 전업주부들도 "나의 삶을 되찾겠다"며 집밖으로 나섰다. 지금껏 목소리를 죽여왔던 주부들이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지위를확보하면서 더이상 남편과 자녀의 성공에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이같은 주부들의 '외도(外道)'는 경제와 가사 부담을 나누고 여성의 자기발전을 도모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작용 또한 적잖다. 주부가 집밖으로 나가자 집은 텅비기 시작했다. 남편은 '위안'해 줄 사람이 없는 가정을 차츰 멀리한다. 자녀들은 10세만 넘으면 학원과 학교에 얽매여 부모들과는 멀어진다. 가정 공동화(空洞化)는 가정교육 부재를 낳는다.

가정교육은 국민성을 가름한다. 서구 각 국의 특징적인 가정교육은 독특한 국민성과 직결될 만큼인성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엄한 가정교육으로 이름난 프랑스는 국어교육에 대한 열성이 남다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부터 부모들은 틀린 문법, 천박한 표현, 부정확한 발음은 물론 그릇된단어선택까지 꼼꼼히 지적한다.

영국의 가정교육은 '가문교육'이다. 자녀가 밖에 나가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오면 부모들은 "너는어느 가문 누구누구의 자손인데 그런 행동은 곤란하다"며 나무란다. 어려서부터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준다.

독일은 합리적이며 실리적인 가정교육으로 정평이 나있다. 부모들은 불필요한 교육열에 시간과돈을 낭비하는 대신 자녀가 상식을 갖춘 시민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를 바란다. 절제된 모습의 독일국민은 여기서 탄생한다.

철학이 실종된 우리나라의 가정교육은 결국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미숙한 사회구성원을배출하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국민학교 고학년만 되면 부모와의 대화를 기피한다. 대화 수준이맞지않기 때문이다. 랩을 흥얼거리고 NBA(미국프로농구)나 WWF(미국프로레슬링), 슬램덩크(일본농구만화)에 심취한 아이들과 자녀의 일류대학 진학이 자신의 신분상승이라고 꿈꾸는 부모들사이의 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가정문제 전문가들은 일탈된 가정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선 가족 구성원 모두 현재의 기대치를 조금씩 낮추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남편은 아내에 대한, 아내는 남편에 대한, 부모는 자식에 대한, 자식은 부모에 대한 기대의 수준을 한단계 낮춤으로써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을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효성가톨릭대 가정관리학과 김정옥 교수는 "소위 가정해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기성세대가 답습해 온 그릇된 가정관이 파괴되는 서곡에 불과하다"며 "철학이 실종된 현대 가정이 공중분해되지 않고 버텨나가려면 구성원 서로간의 따스한 배려가 어느 때보다소중하다"고 말했다. 〈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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