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영어 패권주의

입력 1997-02-28 00:00:00

"김영민〈전주한일신학대학교수·철학〉"

일찍이 신채호 선생은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못하고 주의의 조선이되고만다"고 개탄했다. 정신문화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제대로 키우거나 건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독일의 세계적 석학 하버마스의 방문 열풍이 식고나자 어느 철학교수는 여전히 '하버마스의 한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풍토를 꼬집었다. 특히 그는 왜 그 흔한 통역조차 달지 않은 채 하버마스 혼자만 편리한 외국어로 모든 토의와 강연을 진행시켜야 했는지를 따졌다.*언어문화의 식민지화

남한의 전 지역에서 여러 외래식물들이 토종을 제압하고 맹렬한 기세로 번지고 있다고 한다. 서양민들레는 서울 등 도심에서 토종 민들레를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서양 등골나무, 서양메꽃, 아카시 나무, 그리고 족제비싸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한강 이남의 수계(水界)는 서양의 식민지'라는 보고가 있었다. 민물 생태계를 심각하게 교란시키고 있는 배스,블루길, 떡붕어, 그리고 황소개구리의 폐해에 대한 어느 생물학자의 경고였다. 이 외래동물들이한때는 우리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수입되었다는 사실에서 뼈아픈 지혜를 얻어야 한다.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수계만이 아니라 한글 언어권(圈)마저 서양의 식민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진작에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팝스 잉글리시로 새벽을 깨고 팝송으로 밤을 부수는 데에 익숙하다. 일본의 TV를 모방해서 외국인을 양념처럼 내세우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굿 모닝'을 '좋은 아침'으로 옮겨 쓰는 짓은 한때 '에어플레인'을 '날틀'로 옮겨보던 심리와는 다르다. 불씨나 시비거리라는 우리말을 두고도 구태여 '핫 포테이토'를 '뜨거운 감자'로 옮겨쓰는 짓은 단순히 낱말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정신문화의 절맥

거시적으로 보자면 이는 온고지신과 존고창신(存古暢新)의 과제로 수렴된다. 문제의 패턴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우리 역사, 특히 근대사는 파행과 질곡의 연속이었다. 둘째, 그 사이 우리의정신문화적 전통을 제대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했다. 셋째, 이 절맥은 정신문화적의 진공상태를낳았다. 넷째, 문화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잃은 상태에서 외래의 각종 수입품들이 이 진공을 어지럽게 채우고 있다. 다섯째, 이 치장과 전시가 근대화요 세계화라고 착각하지만 그 상당부분은 졸부의식, 그리고 개발주의와 야합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세련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내가 보기에는 우리의 교육정책은 이 시대적 소임에 아주 무지하다. 한글로 편지 한장 쓰기를 변비난 놈 인상쓰듯 하는 대학생들이 수두룩한 우리의 대학가. 그 대학에서는 지구화와 세계화의추세에 맞추어 영어로 강의를 하는 과정을 늘리고, 국가고시나 각종의 취업시험을 대비한 영어열풍이 거세다. 그러니 대학에서는 단기적인 실용과 처세를 위한 어학과 기술과목만 강세를 보이고'큰 배움터'다운 '큰 배움'은 실종된다. 외국어 연수비로 뿌리는 돈만 연간 60억 달러, 올해 3월부터는 국립 초등학교 3학년에게 영어수업을 계획 중이고, 지금도 학교밖에서는 만 두살짜리를 위한 특별 영어수업반이 성업중이다. 근대화의 내실은 실종되고, 민족국가에 대한 의식조차 없이 유행같은 세계화로 주변이 어지럽다.

*말은 민족얼의 텃밭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는 주시경 선생의 말을 국수주의적 원론으로 들을 것이 아니다. 말이란 생각과 삶, 그리고 한 문화의 얼이 자생하고 힘을 얻는 텃밭이다.우리 사회처럼 봉건의 잔재와 타율적·편파적·표피적 근대화가 똬리를 튼 위에 성급히 이루어지는 세계화는 필경 문화식민주의의 혐의를 벗기 힘들다. 영어패권주의는 바로 그 문화식민주의의첨병이다. 필요하다면, 필요한대로 열심히 영어도 배우고 일어도 배우자.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좋은 아침이 올 때까지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는 없애버리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