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축성술이 크게 발달한 우리나라는 산성(山城)국가로 불리기도 했다. 신라의 왕경(王京) 경주도 예외는 아니다. 서라벌땅을 발아래로 굽어보는 남산 산허리 적의 침공을 쉽게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돌을 다듬어 축조한 산성이 있었다. 남산신성(南山新城). 천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지금은 허물어져 자취조차 찾기 힘들지만 남산의 북쪽 산허리부분 해목령을 중심으로 윤을골, 큰골, 왕정골, 탑골, 웃밭골등 여러 골짜기를 건너지르며 남산신성이 우뚝하니 솟아 있었다. 둘레3.7㎞의 포곡형(包谷型)산성. '삼국사기'기록에 나타난 보척(步尺)으로 2,천8백55보에 달한다. 신라왕경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남산신성은 유사시 적의 외침을 방어하는 심장부였고 국가의위엄과 호국의지를 유감없이 과시하는 자랑거리였다.
신성은 게눈바위로 불리는 특이한 형상의 큰 바위를 안고 있다. 해목령(蟹目嶺). 해발 2백44m인이 바위에 올라서면 북으로 반월성을 마주보며 경주가 한눈에 들어오고 동으로 명활산과 낭산이,서쪽에는 단석산과 서악마을, 모량골짜기가 가까이 다가선다. 수천년의 고도 서라벌을 한눈에 지켜보기에 가장 좋은 지형이다. 옛 신라인들은 이 해목령을 안고 성을 쌓았다. 신라 진평왕 13년인591년에 쌓은후 문무왕 19년(679년)에 다시 크게 쌓았으니 지금으로부터 1천4백여년전의 일이다.이제껏 고스란히 원형대로 성이 남아있다면 수많은 남산의 유적, 유물가운데 규모면에서 가장 큰유물일 터이다.
성벽은 풍우에 휩쓸려내려 땅속에 파묻히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면서 더러 쓰임새에 따라 사람들의 손에 들려나가 이제 형체조차 찾기 힘들고 그많던 돌들은 흔적도 없다. 그나마성벽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윤을골 게눈바위 남쪽 사면과 탑골 부처바위부근이다. 성벽은 아무렇게나 올린 것이 아니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가로 50,세로 23~30,후장 60cm내외의 크기로 가지런히 다듬은 돌을 엇물려 차곡차곡 쌓았다. 하지만 옛날의 온전한 모습은 찾을 길 없고 고작 몇 단높이의 성벽 일부만 남아 그 위용만 짐작될 뿐이다. 어지러운 잡목가지와 마른 소나무 뿌리가 성벽 틈새를 불쑥 뚫고 나올 정도로 피폐해진 잔해에 가슴이 아려오고 신라천년의 영화가 꿈인듯아련하다.
세월을 뛰어넘어 남산신성의 존재를 오늘까지 확인시켜주는 것이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다. 원래모두 2백여기의 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발견된 신성비는 모두 9기.그중 2기만 완형대로 발견됐고 나머지는 반동강이거나 단편만 남아 있다. 제1비가 지난 34년에발견됐고 가장 최근의 제9비는 지난 94년 1월 등산객에 의해 축성당시 세워둔 원래상태로 처음발견돼 명문판독결과 축성과 관련한 새로운 단서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보관돼 있는 이 신성비들은 신성 축성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축성에 동원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 출신지, 맡은 구역등 기록과 함께 쌓은지 3년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떤 벌도달게 받고 다시 쌓겠다는 맹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얼마만큼 성을 쌓는데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 신성비는 부실공사가 만연한 오늘날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성내에 흔적이 남아있는 장창지(藏倉址)또한 남산신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현재 신라 30대 문무왕 3년(663년)에 지은 거대한 창고로 모두 3군데. 무기창고였던 좌창(左倉)과 우창(右倉),식량창고인 중창(中倉)이 그것이다. 그중 중창은 길이가 99m에 이르는 거대한 건물로 지금은 뒹구는 와편밖에 볼길이 없지만 아직도 불에 타 숯으로 변한 알곡이 발견되기도 한다. 큰 꽃송이를화려하게 새긴 막새기와로 추녀를 장식한 건물이 1백80개의 모난 주춧돌위에 드높게 서 있었을위용은 감은사, 불국사로 이어지는 신라석축예술의 초석이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신라의저력인 남산신성. 작지만 거대한 남산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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