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毛澤東)과 더불어 중국현대사의 '거목(巨木)'으로 일컬어지며 왕조시대 중국황제와 맞먹는권위를 누린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鄧小平)이 19일밤 사망함으로써 중국 현대사에 깊이 새겨진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93세.
'작은 거인', '오뚝이영감(不倒翁)', '중국경제의 총설계사'등 그의 이름앞에 붙어 다니는 현란한수식어들이 상징하듯 그는 한마디로 온갖 시련과 좌절을 몸으로 이겨내면서 중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현대 중국의 거인이었다.
지난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 공산당활동에 참여한 이래 반세기 넘게 몰아닥친 3차례의 실각을 딛고 재기, 끝내는 중국권부의 최정상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누리면서 '개혁·개방','4개 기본원칙',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등의 구호로 12억인구의 중국대륙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끌어나간 그의 생애는 중국 현대사와 영욕을 함께한 것으로 평가된다.지난 77년 8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전국대표대회(11대) 1차 중앙위 전체회의(11기 1중전회)에서 당정치국 상무위원 및 당부주석 등에 피선,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한 이래 지난 90년 3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인민해방군총참모장, 당중앙군사위 주석, 당중앙고문위주임, 국무원부총리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항상 1인자의 공식직함을 갖지 않은채 중국최고통치자로서의 막강한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생명력을 길게 끌고 가는 노련함을 과시했다.
그는 89년 6월 천안문 유혈사태 이후 시들기 시작했던 개혁·개방을 다시 한 차원 높게 불타오르게 했던 저 유명한 남순강화 때까지만 해도 중국개혁파의 최고 보스인 동시에 보수파의 보스이기도 했다.
그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때로는 우파의 보스로, 어떤 때는 보수파의 보스로 시의 적절하게 변신,보수좌파의 불만을 무마하면서 총체적으로는 개혁·개방의 심도를 높여가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왔다.
중대한 개혁조치를 단행할 때마다 먼저 '4개기본노선', '자본계급 자유(부르주아자유) 타파'등과같은 강력한 보수성향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하여 좌파를 만족시켜 선수를 치고, 당대회 때마다 연로한 보수세력을 개혁의지의 신진세력으로 대거 물갈이해온 것이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입증해준다.
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보수파가 득세하여 개혁·개방 정책이 사실상 중단 상태에 빠지자 그는 91년말에서 92년초 사이에 광동성 경제특구들과 상해등 남부개방지역을 시찰하면서 '대담하고도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촉구, 꺼져가던 개혁·개방의 불씨를 단숨에 살려내는 무서운 저력을 보였다.
'자본주의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장은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는 등의 강화로 이른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 보수파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리면서 개혁파를 다시 전면으로 등장시키는 일대 전기를 마련하여 개혁·개방의 심화확대정책을 적어도 1백년간 유지하도록 대세를 잡았다.
등의 이같은 적극적이고도 전면적인 개혁·개방논리는 92년 10월에 열린 14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14전대회)와 이듬해 3월에 열렸던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면서 오늘의 중국을 관류하는 확고한 시대정신이자 국가지도 철학, 그리고 부동의 국책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또한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적 논리중의 하나였던 이른바 '흑묘백묘론(黑描白描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잡으면 된다)'이나 '남파북파론(南坡北坡論:남쪽 등성이를 통하든, 북쪽 등성이를 통하든 정상에만오르면 된다)'은 그가 원칙과 이념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공산주의자였음을 단적으로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념과 권력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문화대혁명과 같은 '물리적 힘을 앞세운 내란적성격의 권력투쟁'으로 중국에 일대 재앙을 안겨줬던 모택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있다.
등소평은 모와는 달리 개인숭배를 혐오하면서도 천자와도 같은 절대 권력을 향유했다는 점에서,그리고 최고권력자에게 순종하기보다는 도전을 통해 만단을 극복하는 강한 저항의식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모와 유사한 측면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다.
85년말 민주화 시위와 89년 천안문사태 당시 권력유지를 위해 보수파와의 타협을 통해 자신의 노선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인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호요방과 조자양을 각각일거에 제거해버리는 냉혹성을 갖고 있다는 점도 모와 겹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의 이당시 냉혹성은 궁극적으로 개혁·개방을 살리기위해 자신의 심복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생전에 브리지게임과 수영, 축구관전및 경극관람을 유난히도 좋아하고 수년전까지 담배피우기를즐겼던 '작은거인' 등소평은 갔지만 그가 남긴 커다란 족적은 개혁. 개방과 같은 엄청난 공적과천안문사태의 유혈진압이라는 과실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으로 중국현대사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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