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권에 예속돼있던 우리나라 경제는 해방과 더불어 그 굴레에서 벗어나긴했으나 취약한경제기반과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일제 식민정책의 숙명적 유산으로 이어받았다.여기에다 국토가 양분돼 자원과 시설이 편재됐던 북한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파행적인 경제구조가더욱 굳어졌다. 또 해방직후 무정부 상태하에서 모든 경제질서가 문란해져 통화량이 급팽창하고물가가 20-25배까지 뛰는 인플레현상이 초래됐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각 금융기관은 저축성향의 급격한 퇴조와 예금유출사태로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 모든 금융기관은 단기상업 금융기관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우리경제는 48년 정부수립이후 점차 안정궤도에 진입, 50년초에는 화폐발행고가 감축되고금융기관도 기능별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질서가 잡혀가던 신생국의 경제는 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다시 미증유의 혼란기를 맞게된다. 전쟁의 와중에서 50년9월15일부터 51년4월말까지 4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됐다. 또 휴전협정 조인 5개월전인 53년2월15일에는 제1차 통화개혁이 단행돼 화폐단위가 종래의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다. 교환율은 1백대 1. 일요일을 기해 단행된 통화개혁은 당시 국회가 휴회중이었으므로 대통령긴급명령으로 공포됐다.
전쟁중인 50년6월말에서 다음해 3월말까지 9개월동안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총예금은 75%%가 증가했으나 화폐발행고는 4백5%%나 증가해 해방직후와 같은 혼돈이 재연되고있음을 보여준다.당시는 전시였으므로 현금통화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 화폐는 금융기관에 환류되지않고 구매력으로 남아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6·25전쟁기간중은 경북금융의 전국비중이 가장 높은 시기였다. 이는 당시 도내 금융기관이 비교적 전쟁피해를 입지않은데다 다수의 금융기관점포가 피난해온 때문으로 풀이된다.휴전 1년뒤인 54년말 도내 금융기관의 예금은 29억7백만환으로 전국비중이 14.9%%, 대출금은 19억7천1백만환으로 12.6%%를 차지했다.
전후 도내 예금의 전국비중은 54년을 저점으로 매년 하락, 60년에는 8.7%%로 낮아졌으며 대출점유비도 11.8%%로 하락했다.
해방이후 60년말까지 대구어음교환소의 교환실적은 45년 10만4천매 32억5천4백만원으로 전국의4.2%%를 차지했으나 전쟁중인 51년에는 12%%로 늘어 대구를 중심으로한 영남지방이 6·25전쟁중에는 우리경제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나 휴전다음해인 54년을 고비로 어음교환고의 전국비중은 낮아지기 시작한다. 즉 54년 6백57억2천1백만환으로 전국의 10.5%%를 차지한데 이어 58년에는 8.4%%, 60년에는 5.9%%로 낮아져40년대말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이는 경북경제의 중핵인 대구가 전화를 입지않아 산업시설이 온존, 제기능을 발휘할수 있었고 방대한 피난민의 유입으로 상업경기가 이례적으로 활기를 띠었으나 휴전과 더불어 인구가 줄어들고서울을 중심으로한 타지역의 산업시설이 원상회복된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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