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 문화유산-첨성대

입력 1997-01-15 15:24:00

동양 최고의 관측대인 첨성대(瞻星臺). 신라 선덕여왕(632~647년)때 축성된 첨성대는 당시 신라인들의 활발한 천문관측 활동을 가늠케하는 독창적 하이테크 건축물이다.

여기에는 산성이나 불탑의 건축양식 경험을 풍부하게 살린 신라인의 높은 과학성과 다른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조형미가 담겨있다.

경주 첨성대가 동양최고의 것이라는 것을 밝힌 일본의 천문학자 유우지(和田雄治)는 천문대의 정자석(井字石)위에 혼천의를 설치하여 관측했을 것으로 지적하고 "뛰어난 건축기술 그리고 높은천문과학 수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건축물이다"고 감탄한바 있다.

신라역사과학관 석우일 관장은 "신라 첨성대는 당시 천문과학의 정수가 충분히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우선 첨성대의 위치가 신라의 천문관측 표준선이었고 받침석의 정사각형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켜 네 방위의 기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위에 세워진 돔 모양의 외형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둥글고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기때문에 계절에 관계없이 햇살의 방향과 그림자의 길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따라 정확한 시간측정도 가능했다. 뿐만아니라 춘분점과 추분점, 또 동지나 하지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1천3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히 남아 전하는 것은 첨성대의 견실한 축조기술 그 자체만으로도 국가적인 자랑거리 인 것이다.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신라 첨성대는 국보 제 31 호. 축조 시기에 대해서 633년과 647년 등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모두 선덕여왕대에 축조했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 구조는 기단과 27단의 본체(몸체), 상단 부분으로 구분되며 기단 너비 5.35m 높이가 9.11m, 몸체의 하단지름 5.18m, 상단 지름 3.06 m 크기다.

본체부는 상징구조물로서의 중심역할을 하며 아담한 술병형의 조형미가 빼어나다. 하부 벽면은수직이지만 점차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고 3분의 1정도 높이에서 약간 급해지며 부드러운 곡선을그리다가 3분의 2 높이에서 완만해진다.

몸체에는 상단의 관측공간에 이르는 계단시설이 있다. 상단에 오르면 관측의기를 중심으로 약간의 활동공간이 있고 그 가장 자리에는 허리춤 높이로 난간을 둘렀다.

기단부는 단단히 다진 기초지반에 지대석을 설치했는데 지대석은 상부의 하중을 받아 지반으로전하기때문에 다른 부재보다 큰 돌을 사용했다.

기단 상·하단의 한 변이 각각 5.18m, 5.36m이고 두께 0.395m 의 장대석 20개로 구성돼 있다. 기단의 남북방향은 약 19도 동쪽으로 돌아가 있다.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27단의 돌은 가장 넓은 아랫단 둘레가 16m, 제일 좁은 상단이 9.2m이다.남측면 중앙에는 0.95m 되는 정방형의 창문이 나 있는데 몸체 돌단의 13단에서 15단 사이로 정남에서 16도 가량 동쪽으로 돌아간 방향이다.

첨성대는 창건당시부터 남쪽 창 아랫부분까지 진흙과 잡석으로 다져진 상태로 채워져 있었다는게관계전문가들의 견해다.

남쪽 창틀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른뒤 내부에서 사다리나 석재를 이용하여 올랐으리라 추측된다.몸체부분의 19단과 20단사이, 25단과 26단 사이에는 사방으로 각각 2개씩의 장대석을 걸쳤다.장대석은 바깥면으로 돌출되게 설치되어 있는데 장대석 끝부분 가장자리에는 못머리와 같은 턱이있어 다른 돌이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이런 구조물은 뒷채움이 없는 빈 공간에서 통부재를 가로 걸침으로써 구조적으로 불안정함을 보완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있다.

상단의 난간 역할을 한 정자석 구조는 장대석 상하단의 2단 구조다. 각 단이 같은 규격의 장대석4개를 정자형으로 쩌놓았다. 정상부의 내부는 약 1.5평으로 2~3인이 활동 가능한 면적이다. 바깥난간은 64cm 정도로 안정성이 있고 기기를 이용한 관측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높이였다.상단부 바닥에는 27단 맨 윗단 내벽에 동쪽의 반쪽만 평판석(1.8m×0.57m)이 남아있다. 창건 당시의 형식은 알 수 없으나 나머지 반은 석재나 목재로 하여 출입이나 관측활동에 지장이 없는 바닥면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정작 천문관측은 어떻게 했을까. 정확한 기록이나 당시의 천문관측기구가 남아있지 않아추측만 할뿐이다. 신라인의 성좌에 관한 지식은 2백80여개의 성좌와 1천4백60여개의 별을 파악한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적도의나 혼천의, 망통(시야를 모으는 기기) 등으로 별의 위치를 파악하고 길·흉·화·복을 점쳤다.

고대에는 하늘의 변화를 살피는 일이 국가의 흥망과 왕권의 안위에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자연히위정자는 천체관측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돼 천문학이 번성했던 것이다. 경주의 낭산(狼山) 안압자(월지) 대릉원 등의 명칭은 신라인이 파악했던 별의 이름이다. 이것은 경주가 당시 천문사상이 반영된 도시임을 입증하고 있으며 첨성대는 신라인과 천문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李春洙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