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낭만에 대하여

입력 1996-12-27 14:15:00

성탄절이나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곳이 시내의 음악감상실이다. 학창시절이나 실업자시절에 무료한 시간을 죽이던 곳이었는데 특히 성탄절 전야나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젊은이들로 붐벼 앉을좌석이 없었다. 그런 날에는 어떤 DJ들은 지금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는 거짓 멘트를 넣어연인들을 몰아내고 손님을 갈기도 하였다.

고전음악감상실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녹향'과 음악가들의 대형부조가 한쪽 벽면을 덮고 있던'하이마트'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즐겨찾던 곳은 삼덕동 어딘가에 있던 '낭만'이었다.단아한 여주인과 각종의 오래된 오디오 세트들로 장식한 분위기, 그리고 커피맛이 좋았다. 고객들은 한정되어 있어 이름은 몰라도 눈인사는 건넬 정도였다. 맨앞좌석에 앉아있다가 신청한 음악이나오면 갖자기 주머니에서 지휘봉을 꺼내어 미친 듯이 지휘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학생들이삼삼오오 입장하여 브람스의 길고도 무거운 교향곡을 참선이라도 하듯 미동도 하지않고 듣기도하였으며, 가끔 생음악이 연주되기도 하였다.

'낭만'은 그후 삼덕성당 후문 근처로 옮겨 '필하모니'라는 이름으로 계속하다가 음식점으로 바뀐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으며 다른 음악감상실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요즘같이 바쁘게 돌아가고 조금만 태만하여도 뒤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대에 사람들이 고전음악을 듣지 않는다고한탄한다거나 문화공간이 없어졌다고 개탄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음악은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는 유일한 오락'이라고 누군가 말하였다. '낭만'을 생각하면 괴팍한천재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콧노래를 듣고는 경악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다.〈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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