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원칙없는 대북한 정책

입력 1996-11-29 14:37:00

"이정복〈서울대교수·정치학〉"

우리 정부는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 이후 북한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경수로 지원과 남북경협을중단하고 4자회담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이러한 대북정책은 우리의 미국에 대한군사적 의존을 고려하면 실현이 어려운 정책이었다. 우리가 경수로 지원을 중단할 경우 북한은미·북간의 제네바 합의에 따른 핵동결정책을 파기할 것이고 미국은 북한의 핵동결정책 파기를막기 위해 한국에 압력을 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고분고분한 韓國'역시나

우려하고 예상했던 바대로 김영삼대통령은 지난24일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선사과 후회담 정책을 수정하자는 압력을 받았고 이를 즉각 수용하였다. 북한은 미국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이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한국 정부라는 인상을 다시 받았을 것이다.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하고만 대화하는 것이 현명한 정책이라는 것도 확인하였을 것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한 이와같은 문제점을 고려해서인지 우리 대통령은 이 결과가 종래의 대북정책의 후퇴가 아니고 남북대화가 없이는 경수로 지원도 불가능하고 북한이 미국하고만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엊그제 강조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와같은 대북정책의 재천명이 정부의 위신을 높이기보다는 다시 한번 추락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없다. 미국은 북한이 진지하게 사과하지 않고 남북대화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경수로 지원을 요구할 것이고 우리 정부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美압력에 맥없는 정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의 실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초에도 정부는 남북 대화의 재개가없이는 경수로 협정 체결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대북정책을 여러번 천명하였으나 결국은 남북대화 재개없는 경수로 협정체결에 동의하였다. 작년 중반의 경수로 공급협정에 있어서도 한국은원래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수용한다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는 대북정책을 강조했으나 이러한 명기없는 공급협정을 받아들였다. 모두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정부 당국자들은 실현이 어려운 대북정책을 깊은 생각없이 천명하고 이를 미국의 압력에 따라 수정하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정책은 북한사정, 우리와 미·일·중·러의 관계, 한국국민들의 대북감정 등 여러가지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사려깊은 정책이어야 한다. 미국의압력이 있더라도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정책적 장점을 가진 대북정책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대북정책은 이번 선(先)사과 후(後)회담 정책에서와 같이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단선적으로 반응하거나 남북대화를 요구하면서 북한은 붕괴단계에 들어갔다는 서로 모순되는 대북발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가지고는 북한을 대화에 끌어들이기도 어렵고 미국의압력에 대항하기도 어렵다.

*즉흥적 정책 이제 그만

정부는 북한에 15만t의 쌀을 지원했고 경수로 건설을 위해 앞으로 수십억달러를 지원하는 호의를베풀기로 되어 있으면서도 남북한 관계는 전혀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대북정책의 수립을 위해 적지않은 규모의 관료기구와 전문 연구기관을 가지고 있다. 정부, 여당에는 대북정책에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도 많다. 또 학계에는 대북정책의 전문가들이 상당수 있다.정부는 대북정책의 수립을 위해 상당한 액수의 예산도 쓰고 있다. 이와같은 방대한 자원을 가진우리 정부가 '기아선상에서 붕괴해 가는' 북한의 대남정책과 전략을 극복할 수 있는 대북정책과전략 하나 수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정부가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수립할 것을 다시한번 촉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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