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잉그리드버그만이 주연한 잔 다르크 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감독한 플레밍의 스칼렛과 함께 영웅적 여성상을 창조했다.
그러자 역사책에서 볼수 있는 잔 다르크의 강한 영웅적 이미지와는 달리 영화의 그녀는 인간적인유약성도 함께 보여주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서양중세는 암흑의 시대 라고 할만큼 전쟁과 살육, 반란과 폭력 그리고 대역병이 끊이지 않은시대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거의 쉴새없이 전쟁을 했다. 14세기 초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프랑스 왕위계승문제로 소위 백년전쟁이 계속되어 프랑스가 사면초가에 이르렀을때 한 농민의 딸이 나타나 프랑스를 구했다.
당시의 프랑스는 국왕에 의한 통제도 없는 약소국이었다. 잔 다르크는 잔인한 침략국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라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국왕을 설득하여 군대지휘를 맡았다. 농민의 딸이 군대를 이끈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냉담했던 장군들도 신앙이 무기 라고 부르짖는 그녀의 순박함에 감심하여 함께 싸워 영국에 승리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갑옷을 입은 잔은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녀는 병사들을 고무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러나 그녀는 식민지 감옥에서 네루가 그 딸에게 보낸 세계사 편지에서 강조했듯이 최초의 민족주의자였다. 네루는 자신의 딸이 인도의 잔이 되기를 바랐으리라. 잔은도탄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향토를 침략자로부터 수호하자고 호소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에게 유관순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그런데 그 호소는 당시까지 없었던 외침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봉건적 관념에 사로잡혀민족주의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국가, 조국이라는 관념이 성숙되지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바로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후 민족통일과절대주의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그 패배로 인해 대륙에서 손을 떼고 해외진출로 전환하여 대영제국을 추구했다.
그러나 농민의 딸이 민중에 미친 엄청난 영향에 국왕과 귀족들은 질투하여 그녀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녀는 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정부는 그녀를 구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종교재판에서 그녀는 마녀로 선고되고 악마의 도움을 받아 군사적으로 성공했다고 판결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신의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한 것이 교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이단자로 취급되었다. 재판관은 그녀를 온갖 수단으로 위협하고 고문하자 그녀는 굴복하고 나는약했다 고 후회하면서 신앙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 고 하며 스스로 화형대에 올랐다. 그 훨씬뒤에 로마교회는 그녀를 단죄한 판결을 철회하고 그녀를 성녀로 추앙했다.
〈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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