每日春秋

입력 1996-10-16 14:21:00

우리 어릴 때는 흑백시절이었다. 흑백사진에, 흑백텔레비전에, 교복도 흑백, 어른들의 가르침도 대체로 명백한 흑백이었고 꾸던 꿈도 흑백이었다. 그 시절TV를 보면 모든것이 좋기만 했는데 축구경기를 볼때는 종종 헷갈렸다. 선수들이 빨간색과 파란색을 입고 나오면 좀더 짙은 회색이 파란색, 조금 옅은 쪽이빨간색 하는 식으로 구별을 좀 할 수 있었지만 노란색과 흰색을 입고 나온 경우엔 흑백 화면으로 서로를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이야 모두들 컬러TV를보고 있으니 빨간색과 파란색을 비교해 어느쪽이 더 검고 어느쪽이 더 희냐고묻는다면 아마 물은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에도흑백밖에 구별할 수 없는 흑백TV를 가진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컬러TV가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는 요즘, 빨간색과 파란색을 서로 흑백으로비교할 수 없듯이 삶에 대한 가치도 이제 컬러시대에 접어들어 저마다의 개성추구가 새로운 가치기준이 되었다. 개인주의와 솔직함이, 구세대들의 흑백기준으론 철없고 버릇없음으로 보일지몰라도 합리주의와 당당함으로 하나의 색깔을얻었다. 포르노그라피라는 말이 하나도 부끄럼없는 문화용어가 되고, 얼마전에는 상영물의 사전심사가 위헌이라 결정난 바 있으니 이제 외형상 감추어졌던것이 떳떳한 저마다의 색깔을 찾을 조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색깔들이 반드시 흑백으로 비교될 수 없는가. 채도가 낮은 그래서 검은 색이 많이 섞인 빨간색은 비록 빨간색이라고 주장할 지는 몰라도 분명 검고 어두운 색이다. 도덕과 윤리가 비록 빨간색이라고 주장할 지는몰라도 분명 검고 어두운 색이다. 도덕과 윤리가 어스름한 이 저녁, 모든 원색이 검게만 보이는 것 같고 섣불리 나서서 흑백을 가리다간 쉰세대 색맹이라는소리를 들을 것 같아, 신사고를 빙자한 컬러논리에 주눅들어 있는 우리 어르신들이여, 톡톡튀는 텔레비전 속 스타들의 탁한 행동과 요사이 한참 인기있는 어느 드라마의 내용이 그것도 떳떳한 개성의 한 색깔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에게적어도 그 색깔의 채도는 준엄히 일깨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세강병원.신경외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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