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옷'과 성묘

입력 1996-09-24 00:00:00

추석 성묘때가 되면 가끔 사발옷 얘기가 떠오른다. 옛날 어느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모진 가난을 견디다 못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착하고 가엾은 아 내를 묻으면서 수의조차 입힐 형편이 못된 선비는 나신(裸身)으로 관속에 누운 모습을 보다 못해 수의대신 사발을 엎어 아랫도리를 가려주고 장례를 치렀다. 훗날 아내의 묘터가 명당이었던지 애틋한 사랑의 지성이 통했던지 과거에 등과 한 선비는 매년 성묘때마다 아내의 사발옷을 생각하며 애통한 사모의 정을 나 누고 가곤 했다는 얘기다.성묘길에는 누구나 선비의 사발옷 사연처럼 슬픈 추 억이나 가슴아픈 회한, 또는 정겨운 사모의 정을 안고들 간다.

초라했던 시절에 꾸민 조그만 무덤 앞에 풀섶에서 꺾은 가을꽃 한다발과 청주 한잔 부어놓고 회한에 찬 가슴을 달래는 사람들, 반대로 고향 마을 어귀에 고급 차 세워놓고 돈 잘벌고 출세한 오늘의 처지를 조상 음덕이라 감읍하는 사람들. 어느쪽이든 성묘의 사연은 저마다 소중한 삶의 조각들이다. 상석(床石)하나 변 변히 놓지 못한 무덤 앞에서 자식들을 데리고 앉아 햇과일 몇개 깎아놓고 있노 라면 건너편 번쩍이는 비석, 바위만한 상석에 둘러앉아 유난히 크게 웃어대는 잘난 집안의 성묘 모습들을 보면서 웬지 자식앞에 불효를 보이는것 같은 심정 이 드는 것도 어쩔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생전에 못다했던 아쉬움이 크면 클수록, 지금의 사는 처지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승에서 인연을 가졌던 무덤속의 먼저간 사람을 더 애잔하게 기억하고 싶어지 고 간절히 회상하는게 인간의 심사다.

그래서 물질로든 때늦은 회한의 통회로든 그사람에게 못다했다고 생각되는 마 음의 빚을 보상함으로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어 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성묘 꽃다발이 크면 클수록 생전에 고인에 게 사발옷 입혀 보낸듯 죄스런 아쉬움을 더많이 가진, 그러면서도 화사한 성묘 를 하는 이들 못잖게 착한 사람들 이라는….

누구나 다그렇겠지만 조상이든 먼저간 아내나 남편이든 그님의 묘소앞에 꿇어 엎디어 절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승에 남은 자식 앞날 잘되라고 부탁 하는 심정을 띄워 보내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하느님과 부처님 앞에서 기원하는 소망과는 또다른 인간적 갈망과 요구를 성묘 자리에서나마 터놓고 할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나 부처님보다 조금은 만만하고 편하고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살이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기껏 1년에 한번 찾아와 못다했던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로 자위하고 집안 발복(發福) 기원이나 하는 성묘라고 해서 굳이 탓할 것도 없다. 성묘를 갈만한 인연이라면 부족했던 과거도 잘못된 회한도 그 쪽에서 먼저 용서해 줄수 있는 넉넉한 사랑 을 가졌을테고. 발복을 빌지 않아 도 더 걱정하고 애타하고 도와주고 싶어 할 고인의 마음 역시 사발옷을 입혀 보내도 장원급제를 도와준 선비 아내의 심정과 다를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네가 유교문화와 효(孝)의 문화를 내세우지만 칠레나 에콰도르 같은 남미 의 서민들은 성묘를 거의 매주일마다 갈만큼 고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이 깊다. 일요일이면 납골당이나 도시 외곽 공원 묘소에는 싱싱한 새 꽃다발을 바 꿔 꽂아 놓으려는 성묘인파로 차고 넘친다.

아빠, 사랑해요 어저께는 애인과 첫 데이트를 했어요. 그의 이름은 산호세예 요 여보, 둘째 애가 첫 애기를 가졌어요. 아들이겠지요…

애틋한 사랑이 담긴 메모쪽지들은 거의 매주 새로운 사연을 담아 바꿔 꽂힌다. 헐벗고 못살아서 발복기원이 절실할것 같은 그들이지만 공원을 거닐며 성묘 사 연 메모글들을 읽어 보노라면 한결같이 현재의 삶이 즐겁고 신난다는 기쁨을 전해주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생기있는 삶, 참다운 애모의 정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다. 눈물과 회한, 남은 이들을 위한 발복의 기도는 우리네가 사발옷 사연이 많 았던 한(恨)의 민족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매년 20만기의 무덤으로 국토를 장 식하고 호화분묘 논란에다 명당터를 사고 파는 그릇된 장묘문화는 이제 성숙된 국민의식으로 고쳐야 할 때가 됐다.

집집마다 즐겁고 정겨운 추석이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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