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島는 우리땅

입력 1996-02-07 14:02:00

"新羅때 이미 白頭大幹 34개섬 5만6천 여坪"

동해에 격랑이 몰아칠 조짐이 보이고 있다. 격랑의 진원은 일본이다. 일본은 2백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설정과 관련 독도를 자국령에 포함시키려 하고있다.그래서 백두대간에서 떨어져 나온 우리 땅의 막내 독도는 더욱 외롭다. 일본의도발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관심을 가질 때 생긴다. 일본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잠재우는 방법은 독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독도의역사, 생태 등을 5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註〉

① 독도의 현황과 역사(우리 영토의 근거)

독도는 약 5천만년전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와 울릉도와 함께 화산분출로 형성된 화산섬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2㎞, 포항에서는 2백62㎞ 떨어져 있으며 경위도상으로는 동경 131도 52분33초, 북위 37도14분18초에 자리한다.

독도는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 산42에서 75번지에 걸쳐있으며 35필지 34개섬으로 이뤄져 있다. 34개섬중 가장 큰 두 개섬은 동도(산67번지)와 서도(산63번지). 동도는 1만9천6백5평이며 서도는 조금 더넓은 2만7천8백평이다. 나머지 다른 섬까지 합친 총면적은 5만6천4백16평.높이도 서도가 해발1백68m로 해발 98m인 동도보다 더 높다. 그러나 바다위로 드러난 독도는 빙산에 불과하다. 독도는 수중화산 폭발로 형성된 섬이어서 물밑에 잠겨진 부분을 합치면 제주도보다 넓다.

독도의 기후는 동해 난류가 연중 흘러 온난 다습하다. 비와 눈이 많이 오는 탓에 연평균 강수량은 1천3백㎜나 된다. 또 흐린 날씨가 많아 1년중 맑은 날씨는평균57일에 불과하다. 독도는 독도(禿島)다. 지반이 척박한 화산암인데다 가파른 경사지가 대부분이어서 나무가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울릉 주민을 비롯여러 민간단체및 울릉군이 지난 73년부터 1만2천여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으나 겨우 5백여 그루만 살아남았다.

최초의 독도주민은 독도 물거미 고 최종덕씨(87년 뇌일혈로 대구에서 작고).그는 지난65년부터 서도에 집을 짓고 고기를 잡고 양식을 하다 81년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겼다. 최씨가 세상을 떠난 뒤 독도에 살고있는 주민은 현재 김성도씨(56)부부 2명 뿐이다. 김씨는 91년 주민등록을 옮겨 홀로 독도를 지켜왔다.김씨에 앞서 최씨의 사위 조모씨 부부가 한 때 독도에 터전을 마련하는 듯 했으나 이들은 곧 떠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독도에 관한 기록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이사부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우산도로 부른 것이다. 고려사 울릉도편 권58(1452년간)에도 우산(于山), 무릉(武陵)은 二島이고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않아 바람이 잔잔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로 발견할 수 있다 고 적혀있다. 여기서 우산은 울릉도고, 무릉은 독도다. 이후 성종때에 이르러 삼봉도(三峯島)로 이름이바뀌고 정조때에는 가지도(可支島)가 된다.

독도가 오늘의 이름을 가진 것은 구한말 고종때인 1881년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울릉 군수의 보고서에 본군소속 독도 로 기록돼있어 고종때부터 독도로 불렸다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시킨 것은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인 1905년이다.물론 강제로 편입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면서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시마네(島根)현 고시제40호로 독도편입을 결정했다. 국가 명의가 아닌 일개 현의 고시로 영토편입을 확정한 것이다. 이것만 봐도 일본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입증된다.

〈曺永昌.金敎盛.許榮國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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