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 처단 사건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그 첫번째 것은 미국인들이 처음으로 한국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건재하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자세히 보도함으로써 한국 사정을 처음으로 일반에 알렸다. 뉴욕 타임스 신문은 "지금까지 한국인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해 가치 없는 국민인줄 흔히 생각해 왔으나, 이번 사건으로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쓰기도 했다.두번째는 일본에도 강력한 경고가 됐음이었다. 도쿄의 신문들은 호외까지 발행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일본왕은 친서를 보내 조문했고, 한국통감 伊藤博文은 애통해 못견뎌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등박문 역시 다음해 안중근의거로 처단됐다. 이 의거 역시 스티븐스 처단에 고무됐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세번째 반향은 미국의 우리 한국인들로 하여금 연대 조직을 결성해 보다 효과적으로 극일(克日)운동에 나서게 한 것이었다. 미주 동포들은 이 사건과 그 4개월 뒤의 덴버회의 등을 거치면서 결속을 강화, 10여개월만에 '대한인국민회'를 출범시키는 것이다.
**하늘이 기회 줬으니…
의거 당일 밤9시30분 대책회의를 소집한 본토 공동회는 동포에게 보내는 성명문을 채택한 뒤 즉각 재판비용 모금에 들어갔다. "우리 억울한 사정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없어 항상 개탄해 왔도다. 오늘 의거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걸 이룰 수 있었을까. 앞으로 열릴 재판은 사실은 우리의 독립을 재판하는 것이니, 여기서 이겨야 우리 2천만이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 하늘이 기회를 줬으니 잃지 말고 힘써 4천년 역사에 생광이 되게 하자" 경고문은 비장한 각오를 새기고 있었다.재판 비용에 대라며 보내온 돈이 무려 7천4백여 달러에 달했다. 모두가 한달 30여달러를 버느라근근히 노동으로 살고 있을 즈음, 이는 엄청난 액수였다. 물가를 감안하면 아마 지금 돈 30만달러는 될 액수였다.
본토는 물론 하와이에서도 의연금이 답지했다. 심지어 노예생활 하던 멕시코 동포로부터도 성금이 왔으며, 중국 상해에서도 돈을 보냈다. 일본 동포들도 마찬가지였고 국내에서도 그랬다. 이 돈들은 거의가 변호사 비용으로 지출됐다. 열성적인 변호사가 3명이나 우리를 돕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일본측도 엄청난 투자를 해가며 우리 의사들이 사형 선고를 받게 하려 애썼다. 형사 사건인데도불구하고 구태여 많은 돈을 들여 변호사를 고용, 검사가 할 일을 거들게 했다. 수많은 재판 보조자료를 날라다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의 것이었다. 일반사건이라면 명백히 살인 미수로 판정될텐데도 田의사가 먼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됐다. 사건 발생 석달만이었다.
이어 사건 9개월만인 1909년 1월2일 있은 선고 공판에서 張의사도 '2급 살인' 판정을 받았다. 25년 금고형이 내려진 이 공판에서는 "張의사가 애국심에 불타 비정상적 정신 상태에서 행한 살인인 만큼 일반 계획 살인과는 다르다"고 판시됐다.
풀려난 田의사는 부인과 아들을 먼저 잃는 등 불행을 겪다가 1947년 64세로 별세했다. 張의사는10년을 복역하고 1919년1월 출옥했으나 1930년 병원에서 투신 자살함으로써 일생을 마감했다.재판 투쟁 중에 정신적 단합을 공고히 한 동포들은 재판 진행 중이던 1908년11월, 드디어 연대조직 결성을 발기했다. 이달 30일 본토 공립협회 회장 鄭在寬과 지도자 崔正益-李大爲-姜永大-黃思鎔, 하와이 조직 회장 鄭元明 및 지도자 韓在明-金聲權-閔燦鎬-安元奎-姜永韶 등이 이에 합의한것이었다.
1909년 2월1일 통일조직을 출범시키되, 소단위 지역별로 '지방회'로 모이고, 광역단체 '지방총회'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며, 총합체로 '중앙총회'를 가동한다는 것이었다. 직후 미국 본토 단체는 '북미지방총회'로 이름을 바꿔 자율 운영에 들어가고, '하와이 지방총회'도 출범하게 된다.**교육금등 납부의무
회원들은 입회비와 월회비-교육금-구제금 납부 의무를 지며, 수입금은 지방회에서 걷되 일부를지방총회에 보내고, 지방총회는 그 중 일부를 다시 중앙총회로 보내 전체사업을 하게 했다. 신문발행과 장학 등이 주요 사업이었다.
1909년2월1일 국민회가 창립되던 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성대한 경축식이 벌어졌다. 하와이서는전체 동포가 이날을 임시 휴일로 한 뒤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았다. 농장들도 이날을 한국인 경축일로 인정했다. 호놀룰루 축하식에는 1천여명의 동포가 운집했다. 미국의 하와이 총독도 참석해축하했다. 조국에서도 유림들까지 나서 축하문을 보내 왔다. 그 2년 뒤 자결 순국한 러시아 공사李範晉선생은 유산 3천달러를 국민회에 기탁토록 유언하기도 했다. 동포들은 이날을 새로운 우리정부가 들어선 날로 받아들였다.
북미지방총회 회관은 1936년 LA로 옮기기 전까지는 줄곧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처음엔 종전의 공립회관을 이어 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공립회관은 퍼시픽가에 있다가 일년만에대지진으로 파괴됐다. 이때문에 샌프란시스코만(灣) 건너 오클랜드시로 피난해 일년을 지내다가샌프란시스코가 복구되자 1907년에 부캐넌(Buchanan)街 1944호로 되돌아 왔다. 이곳에서는 1910년 9월말까지 3년반을 지냈다. 1909년 2월 출범한 국민회가 물려 받은 것이 바로 이 부캐넌가 회관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국민회는 너무도 곤궁해서 기관지 신한민보조차 휴간해야 할 지경이었다.LA지역 교포로서 이곳을 방문했던 안석중씨가 "이래서는 안된다"며 모금에 나설 정도였다.사라진 독립유적
그 결과 마련된 것이 페리(Perry)街 232호 회관이었다. 3천5백달러를 주고 사 1910년10월1일 입주한 엄연한 우리 건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곳이 돼 있었다.샌프란시스코만을 가로지르는 만교(베이브리지) 지상 연결 구간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첫 공립회관 자리와 달리 한인 거주지인 차이나타운을 벗어난 이곳 일대는 공장 및 창고지대가 돼 있기도 했다.
국민회는 1914년6월 이 회관을 팔고 12월 오크(Oak)가 1053호로 옮겼다. 돈을 불려 6천5백달러를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먼저 있던 부캐넌가와도 가까운 거리였다. 부캐넌가는 남북으로난 길이고, 오크가는 동서 도로여서 오크가 500호 쯤에서 두 도로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것이다.국민회는 30년대 LA 이사 때까지 여기 있었다.
이 회관은 당시 감리교회를 겸해 사용돼 특히 10년대 이후 들어온 사진 결혼 신부들 거의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교포들에겐 잊을 수 없는 건물이 됐다고 이곳 김도라할머니가 전했다.때문에 2년전 현지 교포들이 이 집을 되사려 시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건물 역시 당시 2층이던 것이 3층으로 개조돼 본모습을 잃었다고 金할머니는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한인촌에서는먼 곳이었다. 유명한 금문(Golden Gate)공원에서 남쪽으로 다섯 블록 쯤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거의 흑인촌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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