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칼럼-'하좌'의 정신

입력 1995-12-26 08:00:00

**소유욕 초월한 여운…언젠가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서화전시회를 보러갔다가 '하좌'라는 글씨앞에 서서 움직일수가 없었다. 고운여선생이 무심의 경지에서 쓰신행초로 '불연지대연'의 서품에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 글씨의 정확한 뜻을알지는 못한다. 다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홀연히 떠난후 그곳에 남은 여운을 두고 쓴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노자의 '일을 이루고 몸을 떠나는'(공성이신퇴)경지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 작품을 사고 싶었지만 돈사정도 사정이었지만 그 글씨의 품격과 내용이 소유욕을 버리라고 하는 것 같아 담담히 그 자리를 떠났다. 나로서는 작으나마 '하좌'의 정신을 실천한 셈이었다. 그 며칠후엔가 다시 전시장엘 들러 그 글씨앞에 한참을 서있다가 떠났다. 수년후 일본의 동경한국문화원에 들렀다가 그곳에 재일교포 전화봉화백의 유화 '백제관음'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전화백의 그림은 일본에서도고가로 거래된다. 문화원장의 설명인즉 어느날 전화백이 그림을 기증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는 것이다. 돈도 없는데 어떻게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화백이 직접 그림을 갖고와 벽에 그림을 걸어 놓더라는 것이다. 문화원장은 식사라도 대접하며 대가문제를 협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외출옷을 입으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느듯 전화백은 그곳을떠나고 없더라는 것이다. 그가 떠나고난 텅빈 방에서 멍하니 백제관음그림을보고 있노라니 마치 그림속의 관음상의 표정속에 전화백이 웃고 있는듯 했다고 전했다. 그말을 들으면서 문득 '하좌'라는 글씨가 새삼 떠올랐다. 식사부담마저 지우지 않으려고 홀연히떠나간후 그자리에 남아있는 여운을 떠올리는순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글씨가 떠오른것이였다.

**'무소유'행의 단순성

그리고 다시 수년후 어느다방구석에서 읽은 신문 기사. 아일랜드인 저명화가 M몰카히씨가 한국에 와서 통도사 수안스님 문하에서 일년간 불화를 배운후 전시회를 열어 얻은 수익금을 모두 한국의 불우한 사람들에게 써달라고기증하고 그리고 홀연히 한국을 떠났다는 것이다.

붓한자루들고 빈손으로 한국을 찾아와 동양불화를 공부한후 전시회를 열어판돈을 다시 전부 기증하고 빈손으로 떠나는 '무소유'행의 단순성이 너무 좋아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후딱 떠올린 것이 '하좌'글씨였다.얼마전 경북대의 경제학교수로계시다가 정년퇴직하신 최황열교수께서 별세하셨다. 정년퇴직하신후 십여년간 거의 대학 관계를 끊다시피 하시어 무심하다는 느낌조차 없지 않았는데 유언에 따라 유체가 학교를 들리셨다. 유언에 따라 조사를 사양하여 우리는 조화만 바치었다. 그리고 팔공산한기슭으로가서 묻히셨다. 유언에 의하여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늘 미국의제도학파 경제학자 베브렌의 경제사상을 좋아하셨고 자본주의사회의 유한계급을 질타한 베브렌의 '유한계급론'을 정성스레 번역 출간하시 더니 베브렌처럼 묘비조차 사양하고 홀연히 가신것이다. 유한계급들처럼 조사나 읽고 묘비나 세우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죽음을 통하여 학교를 잊지 않으신 뜨거운 마음을 보이시고, 자신이 도달한 경제학적 학덕을 스스로 완성하신 것이다.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하신 스승의 무덤에 엎드려 문득 떠올린 것이 '하좌'였다. 팔공산 골짜기가 묘비조차 사양하고 떠나신 스승의 여운으로 가득한 듯했다. '하좌의 골짜기'였다.

**'새역사' 공동작업돼야

전·노두전직대통령이 역사의 심판대위에 서 있다. 권력과 돈앞에 눈에 어두워 붙들려 버린 죄과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문민정부 또한 자신들의 어두운 구석을 가리면서 남의 어두운 구석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죄없는자가 돌을들어 쳐라'고 하는 야유가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역사 바로세우기'가 관객민주주의의 박수를 받아내는 집권여당의 연극으로 진행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반성하여 함께 새 역사를 만드는 공동작업이 되게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가 '하좌'의 자세에 서야 하지 않을까.세모의 거리에서 이미 오래전에 본 '하좌'글씨를 다시 떠올리며 지금 누가갖고 있는지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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