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와 나-광폭한 소비에트 '안전핀'역할

입력 1995-12-25 08:00:00

50년대 말 여러 도시에서 소요가 일어났다.소요는 경찰의 행동에반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때로는 공산당 지역위원회나 시위원회의 건물을 약탈하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소요는거의 매년 일어났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연루됐다.

질서유지를 위해 소비에트 군대의 진압이 필요했지만 이때는 국가안전기구로부터의 요청이 있어야 했다.

안드로포프가 KGB로 왔던 1967년 칠겐트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사태는 심각했다.

KGB에서는 여러번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칠겐트의 사태를 보고했다. 안드로포프는 불행한 결과를 야기시킬 것이라며 개인적인 경고까지 했다.그러나 중앙위원회는 한결 같이 "상황을 각색하지 마시오. 중앙위원회에는더 중요한 일이 있소"라고 했다.

1969년 루브쫄스크에서 일련의사태가 발생했다. 경찰 구치소에서 수감중이던 지방차고장이 죽었다. 사람은 거리에서, 집에서 우연히 죽을수도 있지만 순식간에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거의 모든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KGB가 이와같은 분쟁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KGB를 믿었고 KGB 또한 책임에 대한 두려움 없이 거친 군중들을 진정시켰다.국가안전기구의 죄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KGB는 몇 십년간 민중들에게커다란 신뢰를 보여주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안드로포프 시대에 KGB가직접 나선것은 딱 한번 있었고 그때에 사망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이와 유사한 상황에 대한 KGB의 대처방법과 결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일화로 판단할 수 있다.

7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는 여러 성격의 몇몇 시위가 발생했다. 이들 시위의 주요 슬로건은 "종교의 자유"(침례교도의 요구), "유태인 이주 자유""스탈린 시대로의 복귀 반대"등이었다.

이럴 경우 잔혹한 탄압정책의 지지자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대중 연설자와 집회 조직자들을모스크바에서 추방시키자는 제안도 있었다. 안드로포프는 이러한 일을 전담할 협의회를 구성했다. 소연방 검찰총장 루덴코, 내무장관 쉬첼로꼬프, KGB 모스크바 지부장 랸린, 두명의 KGB 부의장 치네프와쯔비군, 그리고 나였다.공산당 모스크바 시위원회 제1서기 V·V·그리쉰의위임을 받은 랸린이 시위 선동자들을 수도에서 추방하자고 제기했다.내가 신중하게 물었다. "이것은 새로운 트로이카입니까". 루덴코는 나를지지했고, 치네프와 쯔비군은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발언을 요청하여 이것은 명백한 위법행위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쉬첼로꼬프와 랸린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드로포프는 모두가찬성하는 좋은 방안을 숙고하기로 하고 폐회시켰다. 그날 저녁 나는 안드로포프의 전화를 받았다. "문제를 올바르게 제기했소. 아무도 수도에서 추방되지 않을 거야".

이때 나는 출세지향주의자들이사태의 악화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출세에 맞춰 행동한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우리 제5국이 탄압정책을 취한다면 그것은 심각한반정부 행위를 저질렀을 경우뿐이다. 러시아공화국 형법 제58조 10항 70조에따르면 정부의 파괴행위는 반소비에트 선동 및 선전활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

반소비에트 선동 및 선전으로 반국가 지하단체조직, 반소비에트 삐라와출판물 유포, 불법 인쇄소 조직등이 모두 포함된다. 사람들이 만나 현 상태를 걱정하는 말만해도 반소비에트적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법령이 내포하고있는 것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연방 인민대의원 대회에서 이 조항이 개정됐다.안드로포프가 KGB의장으로 지내는 동안그는 단 하루도 휴가를 가지 않았다. 그는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엄청난 서류더미에 묻혀 지냈다.안드로포프는 50세의 나이에 기관에 들어왔다. 내가 보기엔 그는 오랜 담금질을 거친 혁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 이상을 수호해야할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를 짓밟고 있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새로운 사회의 진정한 건설자였다.

오늘날 언론들이 그가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가끔 보이는데 나는 분노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안드로포프는 독서광에다 문학작품을 탐닉했고 음악을 좋아하고 시도 썼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민들을 위한 많은 계획을 제안했다. 그는 시민들의 권리보호를 위해 특별국 창설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늘 현재의 문제였다. "과거를 심판하는 것은 쉽지만현재와 미래를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항상 말했다.안드로포프는 KGB요원들 사이에서만 권위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가 그다지 인기없는 기관인 KGB의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됐을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찬성했다.

그에 대한 호감이 오늘날 인민들 속에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의 KGB업적이 워낙 강했음을 반증한다.KGB가 인민들의 생활에 큰 신뢰를 준 것은바로 그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폭한 시대의 반려자, 음모와 사악함으로 똘똘 뭉쳐진 KGB로 서방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광폭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수 있었던 것은KGB의 존재 때문이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체제의 가장 안전한 길을 제시했고 그 길을 걸어 갔다.

KGB가 늘 인민들의 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70여년동안 KGB는 인민들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10대에 KGB에 입문해 평생을 KGB를 떠나본적이 없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