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시리즈

입력 1995-12-20 08:00:00

**덴버회의**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재미교포의 지도자 안창호선생은 국내로 들어갔다.밖에서 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 출발이 1907년2월.그리고는 신민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을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우성 박용만선생이 여기에 속했다. 도산 보다 3세 아래(1881년생)인 우성은 1905년 도미했다. 그 다음 미주 지역에선 처음으로 독립운동자 대회를 시도했다. 흔히 '덴버회의'라 불리는 1908년의 '애국동지 대표 회의'가 그것이었다. 장소는 미국 중부의 덴버.*미중부 거점 개척

이때 우리 교포들은 아직 거의가 하와이나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다.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24세의 우성은 우선 영딴판인 중부지역을 거점으로 개척,우리 민족을 불러 들였다. 캘리포니아에서 1천㎞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일거리가 풍성했던 때문일 터였다. 바로 철도 건설 사업이었다.남북전쟁 후 미국의 본격 산업화는 철도건설 덕분이었다. 그 시작이 1860년대. 극치는 서해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중부 네브라스카의 오마하까지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된 것(1869)이었다. 이 철도로 우리 교포들도 미국의 핵심지역인 워싱턴-뉴욕 등으로 쉽게 이민-유학을 다닐 수 있었다.철도 건설은 그후에도 계속 증가, 1900년쯤에는 그 길이가 32만㎞에 달했다. 공사가 많으니 일자리도 흔할 터였다.그 결과 철도일은 설탕산업(하와이)-농업(캘리포니아)과 더불어 우리 한민족의 고마운 생업이 됐다.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박용만선생은 작은 아버지 박희병(혹은 장현)밑에서 자랐다. 박희병은 영어를 공부, 1896년부터 2년간 워싱턴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 유학했다.그 후 정부 명령으로 귀국, 평안도 운산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일을 했다. 그러면서 근처 선천에서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일을 조카인 우성도 거들었다.*숙부와 함께 도미

작은 아버지와 달리 우성은 일본어를 공부, 국비로 일본 중학교와 경응의숙에 유학했다. 귀국해서는 만민공동회-보안회 등에서 활동하다 1904년 붙잡혀 옥살이 했다.

숙부 박희병도 미국으로 건너 갔다. 우성의 1905년과 비슷한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숙질은 함께 중부의 네브라스카-콜로라도주 등에 터잡는다.이들이 먼저 개척한 곳은 네브라스카주의 링컨-커니 등 지역이었다. 선천에서 가르쳤던 학생들 상당수가 이곳으로 합류했다. 이승만에 이어 미국박사2호가 된 정한경, OSS계획에 참가하고 유한양행을 창립하기도 했던 유일한등이 그들이었다. 합류자 중 이름이 밝혀진 경우만도 12명에 이른다. 이들은취업하거나 유학했다.

2년뒤(1907) 박용만선생은 다시 서쪽으로 2백-3백여㎞ 떨어진 콜로라도주주도 덴버로도 거점을 넓혔다. 덴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7백여㎞ 떨어진 도시. 지금은 인구 1백70여만명 중 한국인이 1만5천명에 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야 어디 한구석 의지할 데 없던 곳이었다. 이곳 교포들은 "10년전만해도 한국인은 1천5백명도 안됐다"고 했다. LA폭동 이후에 이주자가 늘었다는 것이다.

덴버는 네브라스카의 링컨이나커니시와는 또다른 곳이다. 로키산맥의 요지에 자리 잡아 도시의 해발이 1마일(1천6백m)이나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구름들이 바로 머리 위에 내려 앉아 있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지난 10월4일 취재팀이 갔을 때 이미 높은 산은 거의가 허옇게 눈에 덮여 있었다. 4천3백m 고봉이 50개나 되는 곳이 로키산맥이기 때문일 터이다. 지금은 이 산맥 물로 만든 쿠어스 맥주의 고향, 유명 가방 회사 샘소나이트가 있는 곳 등으로 인식되는 곳이 덴버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이 우리 거점이 된것은 그 산맥에 많이 발달한 광산 일 때문이었다.

우성선생이 숙부와 함께 덴버에 만든 것은 한국인 노동주선소 겸 숙식소였다. 그의 '유전(유전)'을 쓴 김현구선생은 이들이 일 주선을 잘해 한국인이수백명이나 이곳에 몰렸다고 했다. 당시 광산 등은 흔히 중간 보스를 통해노무자를 고용, 그들의 역량이 중요했던 것이다.

우성은 먼길을 함께 걸어 온 숙부를 1906년 덴버에서 사별했다. 이 때문인지 그는 겨우 1년여간 이곳에서 활동하다 링컨시로 되돌아 간다. 하지만 중부거점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8년간, 1912년까지 링컨-커니-헤이스팅스 등에서 활동한다.

이렇게 개척한 덴버 거점으로 우성은 1908년 우리 지도자들을 초청했다.겨우 26세 때 일이었다. "4천년 영광이 땅에 떨어졌으니 뉘 아니 회복코자하리오…그러나 국가의 흥망은 결코 한사람의 손으로 못할 바이니…북미에있는 우리 한인들이 큰 회를 열어 매사를 의논코자 각 동포에 고하니…" 6월10일 이곳으로 모이자는 내용이었다. 재미 한국인의 연대 행동을 촉구하는첫 제안이었다.

*도산 공립협회 불참

이 호소에 따라 각처 대표들이 덴버로 모여 들었다. 본토의 대동보국회 대표 2명, 하와이 대표 1명, 뉴욕에서 온 2명(윤병구-김헌식), 러시아 대표로위임된 2명(이승만-이상설), 이 지역 대표 등 36명이었다. 도산이 만든 공립협회만이 불참했다.

실제 회의가 열린 것은 7월11일. 현지 신문 '로키 마운틴스 뉴스' 13일자는 이 행사를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했다. 취재팀이 덴버공공도서관 마이크로필름으로 찾아낸 당시 기사는 "이 대회는 여러 한인 단체들을 하나로 만들어 일본으로부터의 광복운동을 하기 위해 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참석자는 많아야 30세, 최하 19세까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다만 기사 중의 "이들이 전쟁을 선동할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대목이 미국인의 시각과 관심을 말하는 것같아 입맛을 씁쓸케 했다.

회의에서는 (1)각 단체가 광복운동을 연대해서 하고, (2)우리 사정을 널리알리는데 노력하며 (3)군사학교를 운영하자는 등 합의를 하고 막을 내렸다.첫 연대 결성 시도라는 점과, 장차 '헤이스팅스 군사학교'라는 실체적 성과도 맺는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회의였다.

회의가 열린 곳은 덴버13가와 반노크(Bannock)노가 만나는 지점에 있던 은총(Grace)감리교회였다. 행사 9년전 지어진 이 교회는 그러나 지금은 이스트예일가 4905호로 옮기고 옛 자리는 주차장이 돼 있었다. 1952년에 입주했다는 새 교회 건물에서 만난 미국인 할머니 신자들은 한국과의 인연을 아주 반가워했다.

또 다행하게도 옛 건물 역시 찾을 수 있었다. 웨스트30가 2215호에 있는한국인교회 '덴버연합감리교회'를 찾아 갔더니 조건상목사가 아일리프(Iliff)신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는 전문가 폴 밀레트씨를 소개해줬던 것이다.밀레트씨는 이 신학교 구내로 옮겨져 있는 붉은 벽돌 채플로 안내해 주고는이것이 옮겨 놓은 옛 은총교회 건물이라고 가르쳐줬다. 그는 "70여명은 집회할 수 있는 크기"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아일리프 신학교는 덴버대학교 구내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