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지역 조직들이 최초로 대외 공동 행동에 나선 것은 을사조약의 출발점이 된 러일전쟁 종전협상 때였다.두 나라의 전쟁은 1904년2월8일에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남의땅 만주서 주로 치러진 이 전쟁은 일년반 끌다가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중재로 종전(종전) 협상에 들어간다. 그것이 1905년8월10일.우리로서는 극도로 긴장되는 상황이었다. 우리 운명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나선 것이 미국의 우리 조직들이었다. 이들은 하와이에 있던윤병구(윤병구)선생을 대표로 임명해 대처했다.
서울출신의 당시 23세이던 그는 국내 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워 선교사통역일을 하다 이민 와 있던 참이었다. 대부분 노동자인 하와이 이민 중에서유일하다시피 영어를 할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연 지도자가 되지 않을 수없었을 것이다. 에바친목회도 그와 동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윤병구선생은 러일전쟁 종전 회담을 중재하는 미국 대통령 면담을 시도했다. 그는 우선 미국의 육군 장관이던 태프트가 필리핀으로 가기 위해 하와이에 들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1905년6월, 미국인 목사를 통해 미국의하와이 총독을 설득, 태프트를 만난 뒤 그로부터 루스벨트 대통령 면담 소개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즉시 윤병구선생은 뉴욕 근처 별장에 머물고 있던 대통령을 찾아갔다.도중에 이승만도 불러 동행했다. 이승만은 7개월 전(1904년11월) 미국에 도착해 워싱턴의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해 있었다.
이들이 뉴욕에 도착해 루스벨트를 면담한 것은8월4일이었다. 이곳에 와있던 미국의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전날 홍보활동을 하기도 했던 이들은 약30분간의 면담 시간 동안 청원서를 제출하고 도움도 요청했다. 미국은 한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침해받을 때는 자동 개입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활동은 당시 뉴욕타임스에 보도되기도 했다.그러나 루스벨트가 윤병구선생을 만나준 날은 그가 이미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인정한 8일 뒤였다. 겉으로는 우리 대표단을 만나주면서도 그전에 일본 수상 가쓰라(계태랑)와 밀약을 맺었던 것이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강탈을 상호 묵인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었다. 아니, 태프트가 필리핀에 가느라고 하와이에 들러 우리 대표를 만나주고 소개장을 써 준 것 자체가 벌써 사기술이었다. 그는 바로 그 밀약을맺으러 일본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측을 만나준 6일 뒤 루스벨트는뉴욕 위 보스턴 북쪽 포츠머스(Portsmouth)로 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러일강화조약까지 중재했다. 이날(8월10일) 시작돼 9월5일 끝난 종전협상 결과는 러시아까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두달 뒤 한국은 을사조약으로 40년간의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가쓰라-태프트 뒷거래는 아무리 봐도 대사기극이 아닐 수 없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국과의 조약 같은 것은 휴지 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미국이라고가르쳐 주기라도 하는 듯한 사건이었다. 또 한편으론 힘이 없고는 우방도 없다는 야박한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근래에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영원한 승리인양 기념사업을 추진해 미국교포들의 속을 또 뒤집고 있었다. 회담장이었던 뉴햄프셔주 당시 미 해군 공작창에 '포츠머스 조약 기념관'을 만들려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회담 대표들이 묵었다는 웬트워즈 호텔까지 사들일 참이라고 했다. 조금 살만하다고 5천억원씩이나 마구 훑어 먹어버릴 정도로 방만해진 우리에게 지금무엇이 부족한가 다시 생각케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이때의 루스벨트는 미국에서 지금도 아주 쳐주는 대통령인 모양이었다.1908년까지 재직한 그는부통령으로 있다가 1901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된덕분에 자리를 주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재벌의 트러스트를 혁파하고노사분규에서는 노동자 입장을 공정히 인정한 혁신주의적 인물이었다. 또 처음으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 자연보호에 선구자가 됐다. 워싱턴 포토맥강에는 천연 그대로의 조그만 섬이 보존돼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기도 하다.그는 나아가 FDA를 만들어 미국인들의 건강을 끔찍히 생각했다. 우리를 속이고 배신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배알이 뒤틀리는 장면이다.그의 특사로 일본까지 가 검은 뒷거래를 했던 태프트도 그를 이어 공화당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태프트는 민주당의 윌슨에게 져 4년밖에 대통령을 하지 못했다. 윌슨은 그 길로 우리 3. 1운동에 밑불을 지핀 대통령이다.밀약이 맺어진 줄도 모르고 찾아갔던 우리 대표들에게 루스벨트는 청원서접수를 거부했다. "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우리 공사라는 자도 "본국 정부의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날짜가 8월15일이라니느낌이 묘하다. 그리고 3개월 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말았다.
엄청난 사기에 희롱까지 당한 셈인 윤병구선생은 10월에 하와이로 돌아가,그 2년 뒤 이때의 실패를 만회하려 다시 애쓴다. 헤이그 밀사들과 함께 유럽까지 가 홍보활동을 하는 것이다. 헤이그밀사 역시 뿌리는 1905년의 일들에두고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러일조약 때문에 을사조약이 늑결되고,고종이 이에 반발함으로써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가 파견됐기 때문이다. 또그때문에 그는 자리를 뺏겨야 하기도 했다.
그 후 윤병구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조직되자 1913년 2대 총회장을 맡았다가 도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다. 광복 뒤 귀국, 1949년 서울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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