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여고 농구부 남시홍감독

입력 1995-12-06 08:00:00

끝없는 자기극복과 고통이 수반되는 스포츠의 현장. 영광과 좌절속에서 선수들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지만 그 뒤에는 어김없이 희생의 땀을 쏟는 지도자들이 있다.불충실한 남편으로, 미안한 부모로, 때로 반미치광이로 불리면서도 선수들의 성장만을바라며 묵묵히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

외롭고 고통스런 길을 꿋꿋이 걷고 있는 숨은 지도자들을 찾아 그들의 가려진 삶과 아픈 그늘을 조명해 본다.

올해 스포츠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준 팀을 꼽으라면 단연 의성여고 농구부를 떠올릴 수 있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돌풍을 일으키면서도 선수가 부족해 번번이 우승문턱에서 주저앉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던 선수6명의 초미니 농구팀.그 현장에서 누구보다 더 가슴아파했던 이가 바로 남시홍감독(39)이다.93년 우승을 해본뒤로 올해 준우승만 세차례, 결국 우승의 기쁨은 안아보지 못했다.

남감독은 가장 잊지못할 순간을 지난10월 전국체전 결승전으로 기억했다."부상과 5반칙퇴장으로 결국 2명의 선수만 남아 우승을 놓쳤지요. 고통과피로를 전혀 내색않고 뛰어준 선수들 보기가 너무 미안했고 시골학교의 설움이 그때처럼 북받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남감독이 농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계성고 시절.

고교3년으로 짧은 선수생활을 마감한 남감독은 경북대사대를 졸업, 대구시내 ㄱ여고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농구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경북지역 전보발령을 자원했다.

기왕이면 시골학교에서 농구팀 키우는데 청춘을 바쳐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결혼하지 얼마안된 아내 한행지씨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결혼식도 효성여중 체육관에서 할 정도의 남편을 말리기는 불가항력이었다.85년 상주중학교에 부임, 농구팀을 맡은 남감독의 생활은 농구 그 자체였다. 낮에는 훈련, 밤이면 농구교본을 펴들고 훈련일지를 꼼꼼히 적어나갔다.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대학, 실업감독들을 찾아가 훈련방법 전술 등 궁금한 부분을 물어가며 배우기까지 했다.

이같은 생활이 1년여. 마침내 첫번째 결실을 보게됐다. 86년 추계중고연맹전에서 경상북도 농구사상 최초로 3위에 입상한 것. 이후 전국대회에서만 8회 입상하는등 상주중 농구부의 기반을 다져놓은 남감독은 91년 의성여고로옮겼다.

"여고팀이라 더욱 힘들어져 결국 아내까지 나섰지요. 그덕에 선수들 빨래와 식사걱정을 잊을수 있었고 이제야 어느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지난92년 영남대 교육대학원에입학한후 4년이 됐다면서도 다음주부터 시작하는 동계훈련고민에만 빠져있는 남감독의 대학원졸업은 여전히 멀어보였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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