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의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의 역사적 의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스탈린의 개인숭배강요에 대한 N·S·흐루시초프의 거역은 광범위한 개편,즉 나라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길을 열어주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토대가조성되었던가? 아니다.
흐루시초프가 이러한 노선을 결정하기에 앞서 어떠한 내적 투쟁을 겪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제20차 당대회의 연단에 나가야 했던가를 상상해 볼수 있다.
나는 스탈린의 시신이 안치돼 있던 꼴로나 홀에서 몇명의 국가안전기구 요원들과 같이 참석했던 것을 기억한다. 장례조직 위원회의 모든 위원들이 거기 있었는지 아닌지는 지금 말하지 않겠지만, 나는 울고 있던 흐루시초프를잘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울고 있었지만 그는 매우 비통하게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눈물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스탈린의 죄악성에대한 모든 진실을 인민들에게 공개하고, 과거의 무거운 짐을 당으로부터 덜어줌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도 믿고 있다.당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20차 당대회의 이상은 어렵게 그 길을 개척해 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이상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저항에 부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저항을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흐루시초프의 노선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사람들 머리속을혼란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차후의 행동이 반드시 면밀하게 숙고돼야 한다고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소련 사람들에게 스탈린시대처럼 비밀을 안겨줘서는안된다. 심지어 서방에서는 여러번 출판됐던 일이라도 소련에서는 권력 상층부에 조차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제20차 당대회가 개최되기 훨씬 전에이미 기구의 재조직이 시작됐다.1954년 3월 소연방 각료회의 부속기관으로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설립됐다.당시 내무부 차관으로 재직하던 I·A·세로프가 의장으로 임명됐다. 세로프는 매우 소신있고 자유롭게 주인처럼 처신했다. 그리고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흐루시초프가 우크라이나의 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로 있을때 세로프는내무인민위원부를 이끌고 있었으며 거기서 그들의 우정이 시작됐던 것이다.우크라이나 탄압을 통해 이들의 우정은 더욱 공고해졌다.
1954년 여름 흐루시초프는 KGB기구 및 무관지도자회의에 참석해 강령을 발표했다. 회의는 제르진스키(KGB 창설자) 중앙클럽 강당에서 열렸다. 그 건물은 30년대 소련 건축술의 독특한 기념물로서 건축가 포민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는데 오늘까지도 위엄있고 매우 현대적인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흐루시초프의 연설은 약 2시간 지속됐고 그는 국가안전기구의 업무가 자신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를 언급했다. 그는 매우 감동적이고 사실적으로얘기했다. 그는사회주의 합법성 강화와 지도부의 비도덕적 모순의 근절을제기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 연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두는 과거를 영원히 종결짓고 악명높던 라프렌치 베리야와 그의 동조자들이 뿌린 가혹한 유산들과 결별하여 보다 빨리 조직의 비열함을 척결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제20차 공산당대회 후 KGB정국은 복잡했지만 활력소가 적지 않게 비축됐다. 그 덕분에 나라의 국가안정보장 체제의 모든 활동이 재편됐고 합법성도다소 보장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실행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로프는 징벌기관은 오직 징벌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KGB내 긍정적 흐름을 막았다.세로프가 커다란 존경심을 받고 있었다고 말할수는 없다. 융통성이 없고틀에 박힌 사고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릴 정도였다. 집회에서 그의 연설은선임자들의 연설과 판이하게 구별됐다. 예를 들어 20차 당대회이후 시작된뜨빌리시 소요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놀라지 않을수 없다.나는 KGB부의장 S·S·벨리첸꼬가 이끄는 조사단원의 일원으로 그루지야뜨빌리시로 출발했다.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세로프는 즉시 반혁명 음모조직을 적발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어떠한 음모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조직은적발되지 않았다.
그루지야 주민들은 20차 당대회의 흐루시초프 보고서에 대해 극도로 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공화국에서 스탈린에 대한 태도는 특별했다. 그루지야인 대부분에 있어서 스탈린은 민족영웅이었고 기일에는 해마다 기념비에 화환이 증정됐다. 대중집회에서는 스탈린이 좋아했던 노래가 흘러나왔다.그러나 제20차 당대회이후 왜곡된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일부 '충성파'관리들은 꽃가게에다 스탈린동상에 바치는 화환과 리본의 판매를 금지시켰다. 소요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거세게 퍼져나갔다.
꽃가게에는 타인의 이름으로 리본이 주문된뒤 스탈린의 이름으로 바뀌어걸리기도 했으며 길거리에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슬로건이 나붙었다. 아침 무렵 스탈린 동상 주위에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거대한 우상비가서 있던 꾸라의 강변도로는 스탈린을 기리고 20차 당대회의 결정에 반대하러온 사람들로 넘쳐 흘렀다.
며칠동안 뜨빌리시,고리,수후미,바뚜미,꾸따이시 그리고 기타 도시에서 집회가 계속됐다. 지방정부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고리 집회에서 참가한 지방 신문 편집장 마끄발라의 말이 생각난다. "당신들은 내가 스탈린을 거부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이것을 이해하시오. 나는고리에서 태어나 스탈린이 살았던 집 건너편에서 자랐으며 스탈린 학교를 졸업하고 그후 대학도 그의 이름을 딴 학교에서 스탈린장학금을 받고 스탈린에대한 논문으로 졸업했소. 지금 나는 '스탈린 깃발'이란 신문사의 편집장으로일하고 있으니 스탈린은 나에게 어떤 존재겠소"
3월9일 수만명의 시위자들이 스탈린의 동상이 있던 꾸라 강변에서 알렉산드로 언덕을 따라 루스따벨리 대로에 있던 통신국으로 향했다. 군인들이 통신국을 지키고 있었으나 군중들은 그들을 밀치고안으로 들어갔다. 군인중한명이 천장에다 위협사격을 하자 총알이 콘크리트를 맞고 튕겨나오면서 한명이 쓰러졌다. 아수라장 속에서군인중 누군가 군중들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 당시 뜨빌리시에서는 21명이 사망했다.
세로프를 비롯한 중앙의 활동가들은 뜨빌리시에 20차 당대회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 참모부가 실존했다는 소식을 매우 듣고 싶어했다. 세로프의 한 참모는 우리가 시위 참여자들을 아무런 심사도 하지 않고 석방한 것을 이유로당원증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여간 실망스런 것이 아닐수 없었다. 과거광폭한 KGB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1956년 헝가리에서 반소련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나는 수차례 모스크바국립대학 학생들과 면담했다. 흐루시초프에 반대하고 있던 그들중 많은 수는헝가리인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이 충분히 정보를 갖고있지 못한데 대한 오해로 그들을 절대 체포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당시세로프는 헝가리에 있었다. 그는 KGB 제1부의장 P·I·이바슈륀등 간부 그룹들을 호출해 "왜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고 엄중하게 다그쳤다.나는 내가 확신하고 있는 바를 말했다. 학생운동가들은 결코 적이 아니며어떠한 법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체포하는 것은 커다란 실수를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이바슈륀도 도출된 결론에 동의했다.그러나 여전히 탄압의 위협은 존재했으며, 당 중앙위원회 지도부 몇명은KGB의 태만을 비난하면서 탄압을 요구했다. 특히 중앙위원회의 이데올로기담당 서기 P·N·뽀스벨로프는 탄압을 격렬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고 탄압을 피할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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