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음의 조화이룬 거장

입력 1995-11-06 08:00:00

굽히지 않는 예술혼과망향이라는 형극의 삶을 살아오다 이국땅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재독작곡가 윤이상은 한국작곡가로는 유일하게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현대음악의 기수였다.말년에 폐렴등 지병이악화되면서 생을 마감하기전에 고향인 경남 통영땅을 한번 밟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못한채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자식이 음악하는 것을 반대한 부친의 눈을 피해 가출, 일본유학길에 올라 파란만장한 예술가의 길을 시작한 때가 그의 나이 17세. 귀국후통영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56년 스스로 한계를 절감, 39세의 나이에 파리국립음악원으로 재차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무대에서 음악활동을 하면서 59년 독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한국의 궁중음악 색채를 표현한 7개의 악기를 위한 곡을 발표, 세계음악계에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67년 소위 '동백림'사건으로 그의 음악인생은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권력층과 국내정보기관이 반국가, 반체제사건으로 조작, 얽어맨 이 사건으로 서울로 강제송환돼 수감된 그는 독일정부의 강력한 외교적 항의와 각국의 압력에 못이겨 2년여 옥고끝에 풀려나 고국을 떠난뒤 평생동안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71년 독일에 귀화,베를린에 거주하며 작곡의 외길을걸어온 그는 90년 북한을 방문,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하는등의 활동으로친북인사로 낙인찍혀 국내 일부 예술단체가 여러차례 그의 고국방문을 추진했으나 당국의 입국거부로 노구를 이끌고 일본 하네다공항까지 왔다가 쓸쓸히 발길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국내 음악인들과 애호가들이 크게안타까워했다.

그동안 고인의 작품은국내에서 금기시되어오다 82년 대한민국음악제에서'윤이상의 밤'을 타이틀로 실내악곡이 처음 연주됐고 지난해 9월 그의 음악세계를 집중조명하는 '윤이상음악축제'가 서울과 지방에서 열리기도 했다. '동양적 현대음악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적 요소와 서양현대기법을 깊이있게 조화시켜 용해해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72년 뮌헨올림픽 개막때 연주된 오페라 '심청'과 옥중에서 쓴 오페라 '나비의 꿈', 80년 광주민주화 항쟁을 다룬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87년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등 1백50여편의 곡을 남겼으며EMI, 아카디아, 카메라타등 세계적인 레이블의 음반 60여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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