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산책

입력 1995-11-02 08:00:00

기사 파동이후 82년까지 프로기사(기사) 대표 세사람이 한국기원 사무국의실무이사를 맡았던 제도가 폐지된 것은 그 제도가 실패였기 때문이다. 프로기사들이 자신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행정에 뛰어들었지만 수십년 동안 바둑외길을 걸어온 사람들인지라 '현실'을 대응하고 '현실'을 요리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한국기원은 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83년 겨울에서 84년초에 걸쳐 김우중(김우중) 총재, 서정각(서정각) 이사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한국기원에는 일대 변화가생겼다. 서정각 이사장은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서울지검장을 역임하고 은퇴한 법조인으로 대우 그룹의 법률고문 변호사, 김총재에게는 경기고 선배가 된다.기사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획기적인 방안이 실현되었다. 당시 한국기원 소속 80여명 프로기사 가운데 약 3분의2가 국내 유수기업의 바둑부 지도사범으로 '취업'을 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번 나가 바둑강의와 지도를 하는 것으로 초~3단이 월 50만원, 4~5단이 60만원, 6~7단이 70만원, 8~9단과 타이틀보유자가 80만원의 급여를 받는 대우였다.

당시 대졸 초임이 30만원대였으니 파격적인 급여였다. 평균으로 봤을 때당시로서는 대기업 차장 대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그 시절 국내 유수기업들에 모두 바둑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사 취업을 위해 바둑부를 새로 만든 곳이 오히려 많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김총재-서이사장의 '영향력' 덕분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기전의 규모로 비약적으로 커졌다. 대우그룹이 각 신문 바둑 관전기란 끝에 자사(자사)들의 돌출광고를 싣는 대신 2천만원씩을 찬조한 것이다(전 기전에 대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83년 시즌 1억5천만원 수준에 지나지 않던 기전 예산총액이 일약 2배 규모로 불어났다. 옛날 얘기다. 지금은 단일기전규모가 1억5천만원을 넘는 것도 서넛이 되고, 기전 숫자가 17개로 불어난 탓도 있지만, 총 예산은 20억에 이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무국장이 부활해 세번째 인물 교체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런데 그 세사람이 모두 바둑계 인사가 아니라 '외부 영입'이었다는 점이이제 새삼 문제점으로 지적이 되고 있다. 한국기원 사무국장은 한국기원의이사장이 바뀔 때마다 바뀌었고,그때마다 신임 이사장의 측근 인사가 사무국장으로 발탁이 되었다. 이를테면 낙하산 인사 같은 것이었다.바둑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기원에 들어온 신임 사무국장은 한국기원의 현황과 바둑계의 사정을 파악하고 이제 웬만큼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싶으면 임기완료된 이사장과 함께 한국기원을 떠났다.한국기원이 평생 직장이 아니라 언젠가는 떠나게 되는 처지라는 것을 알았기에 업무 자체에 신명이 날리도 없었다. 새로운 일을 의욕적으로 벌리기 보다는 현상을 대과(대과)없이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수가 없었던 그런 정황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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