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와 나-권력다툼… 온나라 휩쓴 "숙청 물결"

입력 1995-10-30 08:00:00

1953년 봄은 항상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당시 나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과를 책임지는 과장 직분이었다. 나는 곧 노련하고 예의바른 첩보요원V·M·쥐갈로프 부과장과 신뢰적인 관계를 맺게 됐다.3월10일 그와 나는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듣고 있었다. 스탈린 사후 정부요직을 개편한다는 내용이었다. 베리야가 소련방 각료회의 제1부의장으로 임명됐고 그는 동시에 해산된 국가보안부의 기능을 수행하는 내무부 장관도 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쥐갈로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쁜 시기가 왔군.재난이 두려워"라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당시 상황은 복잡했다. 나는 쥐갈로프가 왜 이같은 말을 했는지 불안했다.과연 이 말을 무심코 뱉은 것일까, 아니면 나를 시험해보려고 말한 것일까.역사는 그런 경우를 알고 있었다.

나는 곧 다른 몇명의 근무자들과 마찬가지로 해직돼 예비역으로 편성됐다.주로 방송통신 교육을 하던 고등 당간부학교에서 시험을 치면서 두달여를 보냈다. 한번은 직장에 들렀다가 베리야가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곧이전에 같이 일했던 쥐갈로프를 만났다. "자네가 나를 밀고하지 않은 것은다행이야. 만약 자네가 당시 우리 대화에 대해 고발했다면 내게 어떤 일이생겼을지 상상해봐" 그의 말에 나도 "오히려 내쪽에서 감사하는 바야. 나 역시 자네의 밀고가 두려웠어"라고 말하며 안도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베리야가 다시 돌아왔을때 국가안전기구내에 재연됐다.그의 회생은 3개월에 불과했지만, 이 기간동안 30년대 내무인민위원부 체제속에서 근무해 억압적인 방법을 잘 터득하고 있었던 많은 요원들이 안전기구로 돌아왔다. 그들은 심지어 조직조차도 이전처럼 부흥시키려했다.당시 일련의 조작된 캠페인으로 의사들이 피해를 입고 해직된 것은 베리야에게는 단지 교활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리야의 전임자 S·V·이그나찌예프와 그 추종자들을겨냥한 대규모 정치적 음모가 새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려들었고 예외없이 나도 이 재난을 피할 수 없었다. 베리야는이미 1939년 예조프를 대신해 내무인민위원 자리에올랐을때 그 교활한 전술을 터득했었다. 국가안전기구의 지도자들이 체포돼위법과 대중 억압이란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것이다.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가혹한 숙청을 피할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1953년 7월 베리야의 체포는 새로운 재난의 공포로부터 온 나라를 구해주었다. 국가안전기구 의장직에는 베리야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메르끌로프 대신 V·S·아바꾸모프가 임명됐다. 당시 직원들은 새로 임명된 장관을 환대했다. 30년대에 벌써 평직원으로 국가안전기구에 발을 들여놓았던 아바꾸모프는 전시중 군사첩보총국인 '스메르쉬'를 맡았고 스탈린 경호실 차장으로 활동했었다. 스탈린과 같은 천으로 작업복을 해 입을 정도로 그가 스탈린과 가까웠다는 말이 돌기까지 했다.

장관직에 오른 아바꾸모프는 단호한 인사정책을 폈다. 부서의 직원 대부분은 1939~40년에 희생된 사람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었다.아바꾸모프는 군 첩보요원과 이전의 전사들을 관할 지역기구로 끌어들여 지도부 직위뿐만 아니라 평직원으로 임명했다. 중앙기구에도 신진 세력, 즉 전쟁을 겪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부서의 분위기도 어느정도 바뀌게 됐다.아바꾸모프는 스탈린의 의지를 절대적·맹목적으로 추종했고 탄압정책을조장하는 당 지도부의 어떤 지시도 수행했다. 대조국 전쟁 기간과 전후 초기에 고위인사들에 대한 불법 체포가 계속됐고 군에서는 성실한 방첩업무 요원들도 체포됐다. L·M·겔레프 해군함장, N·D·야꼬블레프 포병대장, A·A·노비꼬프 공군대장들의 비참한 운명은 잘 알려져있다. 아바꾸모프는 G·K·쥬꼬프에게까지도 징벌의 칼을 들이댔다.

중앙기구에서 일하면서 놀란 것은 특별 주요업무 담당 취조관이 국가보안부의 여타 분과로부터 완전히 분리돼 일한다는 사실이다. 대신 해당업무의취조관은 작전요원들과 긴밀한 접촉을 하면서 일했다. 만일 스파이나 반소비에트 지하운동을 담당하는 작전부서가 면밀하게 문서를 검증하고 수집된 자료를 심도있게 조사한다면 특별주요업무 담당 취조관은 개별적인 인물의 증언에 기초를 두고 이를 근거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악몽같은 30년대에 실행됐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또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했고 마지막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인정해야 했다. 허위 고발이 놀라울 정도로 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만들어졌고 체포의 물결은 또다시 온 나라를 휩쓸었다.

탄압정책이 재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는 전소련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인 꾸즈네조프가 국가보안부 무대에 나타나면서 완전히 일소됐다. 전시에 레닌그라드 당위원회서기이기도 했던 그는 이미 당시에 커다란권력을 획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꾸즈네조프의 등단이 지적이며 정직한 사람을 절대로 살아서 나오지 못하게하는 탄압속으로 밀어넣는 동기가 될줄은 그누가 알았을까.

당시 나의 모든 나날은 전시의 잔흔이 남아있는 긴장된 업무로 계속됐다.주로 점령당한 지역의 파시스트나 후방에서 파괴공작을 일삼던 반역자들의지시에 따라 행동하던 이전의 범법자들을 담당하는 임무였다. 지도자나 정부시책을 비방하는 반소비에트 발언을 하는 시민들을 다루는 업무도 종종 있었다.

당시 우리는 조국을 위해 성실히 근무했고 선택된 길이 옳은지 그른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이제 많은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각종 탄압들이 사회에서 비난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같은 행동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지 이해됐기 때문이다.나는 여기서 옳지 못한 상부의 지시에 얼마나 자주 맞서야 했는가를 숨김없이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이에 관해 얘기할 수 없었다.각종 탄압은 국가보안부의 하급 요원들에 의해 이해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가능한한 요원들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의 확산을막으려는 조치를 취했다.실제로 우리는 종종 서류준비를 지연시켰고 지도부의 합의 직전에 서류를 송부,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

이처럼 50년대도 30년대와 마찬가지로 탄압이 횡행했고 대중매체도 이에발맞춰'적'에 대한 가차없는 탄압을 주도했다. 심지어 첩보요원들의 나태함을 단도직입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런 모든 상황은 결국 국가안보기구의 업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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