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현실맞서 참된 자유 추구

입력 1995-10-26 08:00:00

며칠전 윤동주의 시가 일본 국정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많은 학생들이 애송한다는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좋은 시란 이처럼 황폐한 질곡의 역사를 뛰어넘은채 파릇한 나뭇잎이나 호젓한 오솔길처럼 순수한 서정과 감동으로 인간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다 인정하듯 윤동주의 시는 편안한 책상앞의 공상을 통해 손쉽게 얻어진 게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어두운 현실을 당당하고 치열하게 살면서 획득한 인간적인 양심과 그 배후에 그늘로 자리잡은 부끄러움에 대한 자기성찰로부터 어렵게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시대와 종족을 초월하는 공감대화 의미망을 폭넓게 형성할 수 있겠는가.요즘 많은 시집과 소설집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실상 우리의 문학적 욕구를 제대로 총족시키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작가들은 저마다나름대로의 개성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나타난 양상은 전체적으로 비슷비슷하다. 상상체계와 인식구조가 너무 닮아 있고, 특히 현실을 치열하게 인식하는 반성적 사유와 새로운 미학적 기반을 찾을 수 없어서 매우안타깝다. 이런 가운데서 노태맹의 첫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를 접하게된건 무척 다행이다. 우선이 시집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마치 울긋불긋한 헝겊이 늘어진 신당(신당)이나 절 입구에서 눈을 부릅뜬 사천왕 앞에 선 듯한느낌을 준다.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유리'를 통해서 노태맹이 통렬하게 비판하는 인간 사회의 황폐함은, 몇백억 몇천억 하면서 터져나온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문제와 직결된 우리의 처참한 정치현실과 묘하게 대응되어 보다 확장된 의미의 통로를 열어놓고 있다. '유리'로 상징되는감옥과 불모의 땅이란 곧 '보통사람'을 자처하며 늘 '믿어달라'고 눈웃음치던 특권층의 배반된 삶에 가혹하게 유린당한 우리 국민들의 현실이 아니던가. 하기야 주왕(주왕)이 어디 옛날에만 존재했겠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사락에 내동댕이쳐진 문왕의 꼴과 다름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노태맹이 강조하듯이 바로 이 추악한 현실, 황량한 사막의감옥을 통해서만 진정한자유와 해탈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은 물론하나가 아니며, 그건 모두 이 시집안에 들어 있다. 오직, 책읽기와 세상읽기에 치열한 독자들에게만 그 장체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엄나무 아래 푸른칼"처럼.〈문학평론가.계명대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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