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낙향이 처벌인가

입력 1995-10-25 08:00:00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이 가·차명계좌에 4백85억원이나 들어있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관심은 비자금의 전체규모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노씨의 사법처리문제에 쏠리고 있다. 보통사람과 관련된 형사사건이라면 이 정도의 증거가 아니더라도 벌써 혐의자에 대한 구속수사가 시작됐을법 한데 노씨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것 같다. 물론 박계동의원이 주장한 4천억원설에 대한진상을 밝히자면 많은 시간이 걸릴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것만으로도 노씨의 사법처리의 진행이 국민감정에 비추어 매우 지지부진한 느낌이다.검찰은 "신한은행에 입금된 4백85억원의 입출금경로및 자금조성경위 파악을 위한 계좌추적에 시간이 많이 걸릴것"이라며 "계좌추적작업이 끝난뒤 조사여부를 결정할것"이라 밝히고 있다. 노씨에 대한 직접조사와 수사는 국민의 진이 빠질 정도로 질질 끌것같다. 검찰의 이같은 태도와 함께 민자당 김윤환대표가 6공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서동권씨를 통해 가까운 시일내에 노씨가 대국민사과와 동시에자신의 비자금전모를 공개한후 낙향토록 향후 처리방침을 제시했다는 소식이다. 김대표가 이러한 방침을 제시했다는 것은 일단노씨의 처리문제에 대한 여권의 입장정리로 볼수있다.김대표의 이같은 제의가 사실이라면 이는 노씨의 비자금문제를 정치적으로타결짓고 검찰이 적당한 선에서 사법적으로 매듭지으려는 것으로 짐작해볼수도 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뒤에도 재임중 불법적으로 조성한 엄청난비자금을 치부해온 사실이 불거졌는데도 사과니 낙향이니하는 정치적 방법으로 종결짓겠다면 이는 김영삼정부의 도덕성에 흠결을 가져올 것이다. 정치권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짓는 방법이 모색될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치적 테두리안에서 사법처리가 적법하게 이뤄진 다음에 논의될수 있을 것이다.

사법처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봉건왕조시대의 귀양살이마냥 법적 제재가아닌 방법으로 전두환전대통령의 경우에 있었던 백담사행과 유사한 낙향을제안했다면 국민감정이 용납치 않을 것이다. 더욱이 노씨의 고향 대구가 그같은 처벌의 의미를 지닌 유형지처럼 인식된다면 대구시민들은 불명예와 불쾌감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잖아도 대구시민들은 5·6공 기간동안지역의 낙후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혜택을 입은양 외지의 오해를 사고있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오고 있다.

어떤 경우라도 사법처리의 선행없는 정치적 처리는 있을수 없다. 사법처리의 속도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를 없앨수 있다. 물끓듯하는 국민의 분노를 정부·여당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정치적 처리로 넘어가려든다면 심각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낙향이 처벌이 될수 있다는 발상을 가졌다면 큰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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