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엄마 일기-건망증

입력 1995-10-23 08:00:00

"보자, 내가 뭘 가지러 왔더라…" 밥을 짓다말고 방으로 들어오신 어머니는 그사이 뭔가를 잊어버리시곤 빈손만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하시곤 했다.닷새장에 다녀와 장보따리를 푸시면서도"그래 내가 뭐가 좀 찜찜터라…까마구 고기도 안먹었는데 우째 자꾸 이라는동…" 하시며 자신의 건망증을 탓하시곤 했다.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참, 우리 엄마 못말려"하고 놀리던 내게 "니도내 나이 돼봐라. 나이 이길 장사는 없느니라"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요즘부쩍 자주 생각난다.

얼마전 빨래를 가스불에 얹어두고 깜빡한채 일을 보러 나갔다가 한참후 그일을 기억해냈을때가 있었다. 그 말못할낭패감이라니. 후들거리는 다리로가까스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죽을 때가 된게야, 죽을때가'

현관문을 열자 매캐한 내음과 함께 연기인지 수증기인지 뿌연 것이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떨리는 가슴으로 연기속을 허우적거리며 들어가 가스불을 끈후 문을 죄다 열어젖히고 빨래찜통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집안의 연기냄새가 없어지기까지 남편으로부터 호되게 퉁을 맞아야만 했다.작은 알람시계를 목에 걸고 부엌일을 한다는 어떤 할머니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냥 웃어넘겼는데 빨래사건이후로는 알람시계를 곰곰이 생각하게됐다. 보리차 한 주전자를 다 졸아들게했나하면 행주와 수저 등도 걸핏하면볶아내는(?) 실수따위가잇따르면서 나는 그옛날 어머니가 "까마구고기도안먹었는데…"하시던 그 평화스러운(?) 건망증을 그리워하곤 한다. 어느새내 아이들로부터 "아휴, 우리엄마는 못말려"라며 놀림받는 나이가 됐다.(대구시 동구 신암5동 67 2차보성타운 109동 3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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