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일반부-외할머니의 인사)-외할머니의 인사
뒷담 감나무에 까치소리 맑게 부서지는 오늘 아침.
팔순 넘은 내 외할머니의 분주한 아침이 시작된다.
"아유, 까치가 울어대니 오늘 웬 반가운 손님이라도 올려나, 그 놈의 까치울음소리 쨍쨍하기도 하다"
"아유, 우리 누렁이, 벌써 일어났구나. 그런데 밥그릇은 왜 또 엎었냐?"어르고 달래는 듯한 소리, 마치 아기를 어루는듯한 목소리에는 잔정이 묻어있다. 골목길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듣는다면 꼭 몇 식구가 살고있는 듯한집인 줄 착각할 만하다.
외할머니의 아침은 이렇게 분주한 인사로 시작된다.
슬하에 딸만 둘 두신 외할머니는 딸 둘 출가시키고 100여호 남짓한 시골에서 혼자 사신다.
혼자 사는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서도 늘 낙천적이고 건강하신 외할머니는길거리에서 부딪치는 돌맹이 하나에도 알은 체를 하신다.
어쩌다 돌이 발에 걸릴 때도 "아유, 고놈의 돌, 하필 요기에 박혀있나?"하며 버릇없는 손주 나무라듯 하신다.
시골에 몇 안되는 국민학생, 건넛집 경님이가 학교에 갔다 올 시간이면 외할머니는 동구밖 숲에 나가신다.
"경님아, 벌써 학교 다녀오냐?"
"아유, 우리 경님이 다리 아프겠다"
"경님아, 오늘 덥지?"
외할머니의 정스러운 인사 건네기에도 경님이는 늘 건성으로 새침을 떼지만 외할머니의 경님이 바래기는 늘 반복된다.
외할머니의 인사는 이렇듯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이다. 살아있는 모든것과 때로는 고정되어 있는 사물과도 맺는 적극적인 관계맺음.이제는 노쇠하셔서 더이상 밭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몇해 전부터 마당 가득밭을 만드신 외할머니.
아침마다 갖가지 채소를 심어놓고 알은 체를 하신다.
부지깽이도 일어나 일을 한다는 바쁜 농사철. 일하러 가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꼭꼭 힘이 되는 인사말을 건네신다.
"올 가을 나락은 잘 여물었는교?"
"인동댁, 송아지 낳았다면서?"
"부뚤이 아부지요, 아침 드셨는교?"
이렇듯 끊임없이 외할머니는 눈 마주치는 모든것에 정스런 인사를 건넨다. 애써 미소를 꾸미지 않아도 만나는 모든것에 금방 환한 반가움으로 얼굴가득 웃음짓는 외할머니.
'사람보는 일이 제일 귀하다'고 혼자 사는 외로움을 그렇게 표현하시는 외할머니가 정작 반가운 손주들이 가면 맞이하는 인사말은 "아유, 아유"하는어쩔줄 모르는 감탄사와 글썽거리는 눈물이다.
늘 절간처럼 고요하고 사람 인기척 드문 외할머니댁이 명절이 되면 동네에서 제일 분주해진다. 늘 알은 체를 하던 외할머니의 정스러움을 잊지 못하는이제 객지 생활을 하는 동네 젊은이들이 꼭꼭 혼자 사는 외할머니댁에 인사를 오는 것이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예의 그 정스러운 인사말로 객지 생활에노곤한 젊은이들의 맺힌 마음을 술술 풀어주시는 것이다.
외할머니의 인사. 단순한 인사건네기가 아닌 할머니의 생활이고 삶인 인사.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의 교류, 그 정스러움, 그 따듯한 마음.아! 외할머니의 인사는 바로 나와 마주치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다.어느 누구보다 외로우실 내 외할머니가 생기있는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이유도 세상과 맺고 있는 그 구별없는 벗들 때문인지도 모른다.늘 나로부터 열려있는 세상살이.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도회지에서 우리가 늘 쓰는 몇 안되는 인사말과는 달리 외할머니의 인사말은 정말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가 때로는 필요에 의해 길들여진 인사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때면 나는 외할머니의 그 구수하고 정많은 인사말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다.
어쩌다 은행에 갈때 "어서오세요"하는 창구직원의 낭랑한 목소리의 인사말도 정겹기보다는 오히려송구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내 외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그 정이 없어서일까.
편안하고 넉넉한 인사말은 이미 도회지에서 사용하기에는 퇴화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삶 속에서 내 외할머니가 지금 함께 한다면혹시 우리들은 수다스럽고 말많은 노인네라고 치부해버리지는 않을까. 아님,우리들의 삶이 다시 넉넉해지고 풍요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내 외할머니의 인사말은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인사이기 때문이다.
인사란 바로 사람과 사람을 맺는 관계이고 그 관계맺음은 바로 우리네의삶을 풍부하고 넉넉하게 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우리 서로 좀더 관심있는 인사말을 건네야겠다.
나는 내 외할머니가 한번도 빠뜨리지 않는 감탄사를 요즘 물려 쓰고 있다.친구들을 만날때도 골목에서 아이들과 마주칠 때도 몸떨리게 반가워한다."아유, 귀여워" "어머! ○○야!"이렇게 가슴 다 열고 만나면 우리는 금방건너뛰는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내 외할머니가 내게 가르쳐 주신 커다란 삶의 교훈. 내게 외할머니는 인사는 바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쯤 여지없이 붉은 고추를 널면서 "아유, 요놈의 고추, 색깔이 곱기도하다. 햇볕에 꼬들꼬들 잘 말려야 한다"하고 말건네고 계실 외할머니."외할머니, 너무너무 보고싶어요"하는 내 인사말이 지금쯤 들리실지….〈구미시 원평3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