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시리즈-국내살인작전

입력 1995-10-11 08:00:00

이렇게 여러 경로로 모여 편성됐듯이 광복군이한일 또한 여러가지였다.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 후세 일반인들을 가장 신나게 하는 것은 영국군-미국군-중국군과의 합동작전이다.중국군 다음으로 광복군이 인연을 맺은 것은 영국군이었다.41년 12월7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이 작전으로 여기에있던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키다시피 했다. 미국측 8척의 전함을 파괴하고 2천명이상의 병력을 몰살시킨 것이다. 출항하고 없었던 미국측 3척의항공모함만이 화를 면했을 뿐이었다.

이 작전은 일본이 태평양 각 지역을 마음놓고 점령하기 위한 방해물 청소작전이었다. 미국 태평양 함대가 궤멸된 이후의 태평양지역은 일본군 놀이터나 다름없이 됐다. 이에일본은 곧바로 동남아지역 침공에 들어가 순식간에싱가포르-동인도-타이-버마를 점령하고 하와이 기습 6개월이내에 필리핀까지휩쓸었다.

전쟁이 이렇게 전개된 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은 종전에버마 남쪽의 랑군항에서 출발해 북구 라시오를 거쳐 중국 곤명(곤명)으로 이어지는 소위 '버마공로'를 통해 연합국 측으로부터 전쟁물자를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버마를 장악한 뒤 이 보급로가 끊긴 것이었다.이에 연합군측은 43년에 이 보급로 탈환작전을 시작, 45년7월 성공할 때까지 2년간 계속했다. 이 작전은 인도에 연고를 갖고 있던 영국군이 주로 수행했던 모양이었다.그러나 일본군과 전투하는데 있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본어 해독자가 영국군에는부족해, 광복군이 여기에 '초빙'된 것이었다. 일본어도 알고 영어도 알아야 노획한 일본군 문서를 번역하고 포로를 심문해 정보를 얻을수 있으며, 일본어로 선전방송을 할수 있기 때문이었다.영국군과의 이같은 합동작전에 첫 길을 연 인사는 약산 김원봉이었다. 인도주재 영국군은 42년도에 이미 김원봉에 연락, 2명의 요원을 지원받아 써보고는 대단히 만족해 했다는 것이다.

그뒤 43년 5월에 임정은 정식계약을 체결, 8월말 9명의 공작대를 파견한다. 대장은 영국군 상위(상위)로 대접하고, 대원은 중위 대접을 한다는 등이조건이었다.이들이 처음 도착한 것은 인도의 캘커타 영국군 인도 총사령부였다. 여기서 다시 방송기술 등에 대해 3개월간 교육받은 대원들은 총사령부-캘커타방송국-최전선인 임팔 등에 나뉘어 배치됐다.

이들의 활동이 또 큰 성과를 거둬 일본군 귀순자가 생겨 나오기도 하자 영국군은 광복군에 추가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복군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부딪혀 추가 파견은 실현되지 않았다.

영국군에 파견됐던 공작대는 45년9월10일 전원이 중경 광복군 사령부로 복귀했다.

미국군과의 합동 작전 준비는 그보다 늦은 45년5월 착수됐다. 그러나 이번작전은 한국으로 우리 청년 대원들을 파견해 조국을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킨다는데 직접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이때까지의 중국군-영국군과 합동 작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미국측의 파트너는 오늘날의 미 정보기관 CIA의 전신인 OSS(41년 7월 창설)였다.

이같은 합작은 서로간에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어쨌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야 전후에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본군과 대전을 치르고 있는 미국은 일본 본토와 중국을 이어 주는 한반도를 회복해야 일본의 허리를 자를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OSS가 추진한 것은 3곳에서 한국 병력을 훈련해 한반도로 투입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중국의 광복군을 훈련시켜 낙하 투입하는 것으로 '독수리작전'이라 불렸다. 또 하나는 중국 연안에 있는 공산 계열 한국 부대를 투입하는 '북중국 첩보작전', 마지막 것은 미국에 있는 한국인을 훈련해투입하는 '납코(NAPKO)작전'이었다.

이렇게 세갈래로 추진된 것 중 실제 준비에 들어간 것은 중국 광복군과 미국의 한국인 청년들을 이용한 두가지였다.중국지역 광복군을 투입하기 위한특수훈련은 광복군 2지대와 3지대를 대상으로 나뉘어 실시됐다. 2지대 훈련은 서안에서 45년5월11일 시작됐다. 3개월을 훈련 코스로 해서 50명씩 2회에걸쳐 1백명을 훈련시킨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된미군 특수요원은 20명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40명까지 늘었다.그러나 여기서 훈련받은 요원들은 실제로 조국에 투입돼 보지는 못하고 말았다. 첫 훈련조는 훈련을 8월4일 끝내고 국내 투입에 대기하고 있었다. 또두번째 훈련조는 8월14일부터 훈련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때 일본군의 항복 소식이 전달된 것이었다.3지대를 대상으로 한 독수리작전 대비훈련은 지대 주둔지 부양이 아닌 입황(입황)에서 실시됐다. 이곳은 부양에서한참 남쪽으로 내려온 곳이다. 여기에 있던 미군항공대 파견대가 훈련소였다. 3지대에서는 첫 훈련 대상으로 20명을 선발, 7월에 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 역시 한달여 훈련 끝에 일본군 항복으로 중단했다.이 독수리작전이 기획된 것은 미국측이 일본의 항복이 빨라야 46년도에나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이 앞당겨지면서 중도에 파의된 것이었다.

이 신나는 작전중 제2지대 훈련장이 있던 서안 두곡(두곡)은 알고보면 이미 신라 시대부터 우리와 인연을 갖고 있던 것이다. 원측대사가 이곳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이곳 유명한 절 흥교사에는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의 묘탑과함께 원측의 묘탑도 있다.제2지대는 두곡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독수리작전훈련은 인근 종남산(종남산)에서 받았다.우리 고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유명한 상징적 산이기도 한 종남산은 지금의 서안이자 옛 당나라 수도 장안이었던 지역을 남쪽으로 둘러 막아주고 있는 진영산맥의 해발 2천6백4m 되는한 봉우리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안시 장안현 자오진(자오진) 일대에 속하는 거대한 종남산에서 옛 독수리작전 훈련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 몇개기록에는 훈련장이 종남산 종남사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종남사라는절은 없었다.종남사를 찾아 헤매던 취재팀에게 장언춘할아버지(76.장안현 왕곡구 오태향)는 "그곳은 종남사가 아니라 미타사일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당시 미군들이 그곳에 주둔했고, 식량 등을 자기나라에서 갖다 쓰는 것을봤다"는 것이었다.

장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미타사는 '종남산 국가 삼림공원'입구에 있었다.이곳은 넓디 넓은 서안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이곳 스님은"종남사라는 곳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미군 훈련장은 종남산에서여기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중국의 한 장군으로부터 이곳에 한국 청년들이있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이 절은 스님만 1백50명 될정도로 컸다는 말도 했다.

물론 그의 말만으로 이곳이 옛 훈련장이었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런 정도로나마 우리의 옛 기상을 다시 더듬어 보고자 할 따름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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