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우리도 벌초 시작합시다"춘길형이 말한다.
나는 언덕길을 내리걷는다. 오를 때와 달리 길이 미끄럽다. 조심해, 하고순옥이가 뒤에서 말한다. 등으로 할머니의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 온다. 노망은 왜 생기는걸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노망은 노인들에게만 있다. 노망이 없는 노인도 있다. 노망이 어떤 노인에게만 왜 생기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할머니는 어떤 때만 노망이 있다. 어떤 때는 멀쩡하다. 할머니는 아기처럼 내 등짝에서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노망이 있던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할머니는 아침 밥도 먹지 않았다.
나는 개울을 따라 내려온다.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 나는 뒤돌아본다. 순옥이가 개울를 건너고 있다. 솔바위 쪽으로 넘어간다."그쪽은 길이 없어"
내가 외친다. 그 아래쪽, 토끼풀밭과 피나물밭이 있다. 아버지가 그 풀밭에 누워 종다리 노래를 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다.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업고 순옥이를 쫓아갈 수 없다. 순옥이의 자태가 싸리숲에가려버린다. 한참을 기다린다. 순옥이가 오지 않았다. 나는 마을 쪽으로 내려간다. 집으로 돌아온다. 할머니를 큰 방에 눕인다. 할머니는 잠이 들었다."시우야"하며 꿈결이듯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할머니 머리에 베개를 고인다. 이불을 덮어준다. 마당으로 나선다. 왕치산 위로 해가 솟았다. 고추잠자리떼가 마당 하늘에서 맴돈다. 나는 건넌방 문을 열어본다. 책꽃이에 책이가득 꽃혀 있다. 낡은 책들이다. 아버지가 책을 읽던 모습이 떠오른다. 책을읽을 때, 아버지는 안경을 찾아주었다. 앉은뱅이 책상도 그대로 있다. 서랍을 열어본다. 만연필과 안경집이있다. 안경집 뚜껑을 열어본다. 안경이 있다. 아버지가 쓰던 검은테안경이다. 아버지처럼 안경집이 있다. 어지럽다.책꽂이의 책이 희미하다. 안경을 안경집 속에 넣는다. 만연필 뚜껑을 열어본다. 책상 위 책꽂이에서 책을 꺼낸다. 아무 쪽이나 펼친다. 장수하늘소 그림이 있다. 장수하늘소는 힘이 세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만연필촉을 책에 그어본다. 먹선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서랍을 열어본다. 공책이 재여있다. 첫권을 꺼낸다. 펼쳐본다. 깨알 같은 글자가 빽빽하다. 곤충, 식물 따위가 글자 옆에 그려져있다. 공책 갈피에서 사진이 떨어진다. 두 장이다. 한장은학교 소풍때 사진이다. 바위 앞에 학생들이 서고 앉았다. 아버지가 앞줄 가운데 앉아 있다. 억새가 바람에 날린다. 한 장은 아버지 혼자 찍은 사진이다. 학교 교실이다. 책상에 식물표본철이 펼쳐져 있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얼굴만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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