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첩보전의 대부분은 심리전이다.서방에서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나 당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정황을 불안하게 만들 의도로 많은 대소 심리전 부대를 운영했다. NATO참모부 속에도 심리전문부대가 활약하고 있었으며 CIA 경우 이러한 임무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반소비에트 기구와 NTS로 불리던 '대공산주의 투쟁연맹'과 같은 망명자계층에서 생긴 그룹들은 '자유'와 '자유스런 유럽'이란 라디오위원회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심리전 전문가들은 소연방 영토내에 분쟁 상황을 조성하고 긴장시키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동원했다. 그들은 소련의 현실에 대한 불신만 야기시킬수있다면 허구에 기초한 허위정보나 사실 왜곡등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60년 모스크바에 빠뜨리스 루콤바란 이름의 인민우호대학이 문을 열었다. 첫 날 부터 이 대학은 미국 대사관의 집중적인 관심 대상이 됐다. 대사관 직원 가네트는 대학생신분으로 공부할 것을 명령받았다. 다양한 민족인학생들 사이에 상호분쟁을 조장하고 교사들에 대해 불신을 유발시키는 임무를 띠고 침투한 것이다.
가네트는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그들에게 서방, 특히 서독에서 공부하라고 부추기며 소련을 떠나라고 꼬드겼다.이 외교관의 활동은 명백히 스파이의 '룰'을 벗어난 파렴치한 행위였다. 우리가 확고한 증거를 입수하고 대학생들을 면담한 결과, 그는 극단적인 소요까지 야기시킬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대사관에 엄중경고했고 가네트는 결국 소련을 떠나야만 했다.
사소한 심리공작이었지만 이런 사례가 여러번 모이면 소련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70,80년대에는 심리전의 센터들이 주로 인권옹호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1976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 안전및 군축문제회담후 명백히 나타났다.
회담의 주도권은 소연방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들에게 있었다. 처음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그 주도권을 결코 지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영국까지도 이 생각에 부정적인 견해를 비치면서 회담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 서방국들은 소련에 대한 심리 전장의 확대를 위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
서방국가들은 소련이 주최한(?) 회담에 참여한 사실을 소위 '세가지 미'에입각한 조건들로 보상받으려 했다. 인간의 권리 즉, 언론의 자유,출판의 자유,거주이동의 자유등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소련은 이 제안을 마지못해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소련내에 존재하는 인권침해 행위를 감추려고 한 때문이 아니라,그 제안이 소련 영토에서심리전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를 명백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명분없이 거절하는 것은 모든 합의를 결렬시킬 위험까지 있었다.막다른 골목길에서 출구를 찾으려던 소련 지도부는 결국 양보의 길을 선택할수 밖에 없었다.
결국 소련 영토내에서 임의의 행동 자유를 얻게된 심리전의 서방 센터들은이를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시대에 있어 '인권옹호운동'은 영웅주의의 후광을 입고 있었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됐다. 이들 핵심운동가들 뒤에는 항상 서방의스파이들이 끈을 대고 우글우글댔다. 인력, 자원지원뿐 아니라 미국 특수기관들은 이들에게 지령까지 내렸다. "…공개 비난, 자기비판을 확대시키고,사회주의의 시민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더욱 가혹한 비판도 서슴지 마시오…" 이들 서류들은 CIA의 금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쇄되어 모스크바에 곳곳에 뿌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당과 국가의 고위지도부에서는 어떤 대처도할수 없었다.
그 상황은 마치 '빈 골문 게임'을 연상시켜주었다. 골키퍼는 골문에서 결코 떠나지 않지만 자신의 태만으로 인해공격수와 수비들을 불안하게 하는것이다. KGB는 서방을 공략하는데 항상 불안했다. 권력의 마비상태가 닥친것이다.
반면 서방 특수요원들의 공격은 더욱 현란해져만 갔다. 1958년에 일어난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겠다.
그 당시 서방특수요원들은 외국으로 출국한 소련인들을 끊임없이 포섭했다. 심지어 우리 시민들을 외국에 체제토록 설득하려는 CIA의 특별계획도 있었다. 서방특수요원들과 심리전 센터는 소련시민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방에 눌러 앉는 것에 우리가 얼마나 병적으로 신경을 쏟는지 알고 있었다.가끔 정확한 카운터 펀치를 맞는경우가 있고 이런 일이 있고 나면 KGB요원및 그 기관장들은 출국자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다하여 가혹한 책임추궁을받았다.
한번은 직접 나가 실태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소련 순양함의 부선장 자격으로 그루지야 기선을 타고 브뤼셀 세계박람회에 참석했다. 우리 시민들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권유하는 서방의기도를 막는 임무였다.
승객들은 프로그램에 따라 관광일정을 시작했다. 첫째날 벨기에의 외국 첩보부 대표는 인민노동연맹(NTS)란 단체가 관광객들의 전향공작을 준비하고있다고 알려왔다. 우리는 모든 승객들을 점검하고 포섭가능순으로 등급을 매겼다. 그리고 나도 개인적으로 전람회를 돌며 미끼를 던져볼 속셈이었다.개인적으로 박람회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해 어떤전시관 입구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러시아말이 들렸다. 중년의 옷을 잘 차려 입은 신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소련인입니까. 잘됐습니다. 저는 파리 기자로 동료와 함께 전람회에 왔습니다"처음에는 평범한 대화가 오갔다. 너무나 평범해 관광객인줄 알았다. 그러나 2시간여 대화가 오고간후 그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여기에 전시된것은 소련에는 없죠?"라고 하더니 소련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저녁이 늦어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나눈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면서 다음날 오후 5시 분수옆에서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다. 활기찬 벨기에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고 배로 돌아왔다.
다음날 우리는 포섭대상자 몇몇을 데리고 브뤼셀 교외로 여행을 떠났다.오후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났다. 브뤼셀에서 겨우 40여㎞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때가 오후 3시. 도로의 자동차들이 질주하면서도 그 어느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30분이 지났다. 마침 경찰차가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차량 수리반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수리반이 나타나지 않았다. 4시가 넘었다. 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것같았다. 그들도 5시경에는 나와같이 박람회장에서 만날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침착하게 "나는 오후 5시까지 전람회에 가야하는데 제때 갈수 있을겁니다. 고작 20분 거리 밖에 남지 않았으니 적어도 25분전쯤에는 다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예상은 정확했다. 25분전쯤 자동차 한대가 우리 옆에 멈춰 서더니 차량수리반은 조금 후에 도착할 것이라면서 자기 차로 모두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차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분수옆에 세웠다.
그 '기자'가 친구와 함께 서 있었다. "나는 '활기찬' 벨기에에 남지 않겠습니다. 넵스끼씨"라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는 너무나 놀라 그자리에서굳어 버렸다. 사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동료 또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포섭되지 않은채 조국 소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서방은 소련에 대해 끊임없는 '심리전'을 펼쳤고 우리도 이에 질세라 본격적인 심리전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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