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명에서 4년만에 4백50여명으로 성장한 광복군의 바탕이 된 자원은 주로 일본군에 소속되거나 일본군을 뒤쫓아 중국에 나왔던 우리 청년들이었다.위의 두 종류 청년들 중에서는 일본군을 뒤따라 중국으로 왔던 청년들이먼저 광복군에 합류하기시작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군속이나 통역, 일본회사원, 일본군을 상대로 한 장사꾼 등등이었다. 1940년 쯤에는 중국내 한국인이 만주에 1백20만명 있는 외에, 북경-천진 일대 10만명 등 화북지역에도20만명이나 됐다는 기록이 있다.우리 광복군이 전선 너머 일본군 지역으로공작 나가는 것은 이들을 포섭해 광복군으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신편 광복군 중에서도 2지대가 주로 이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했었다.일본군 소속 우리 청년들은 이들보다 늦게 중국에 나옴으로써, 주로 44~45년도에 광복군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청년들이 일본군 소속으로 외국 전선으로 처음 나가기 시작한 것은 38년10월 쯤이었다. 일본이 '육군특별지원병령'을 시행, 6개월간 훈련시켜 파견한 것이었다. 일본은 나아가 44년1월에는 '반도인(한국인) 학도 특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을 붙잡아 2월에 전선으로 내보냈다. 더욱이 같은해 9월부터는 아예 징병제가 실시됨으로써 더 늘었다. 44~45년 2년간 징집된 우리 청년은 총 20만9천여명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국내에서는 전투가 없었으니 거의 전원이 외국 전선으로보내졌을 터였다.이들이 광복군에 합류하는 방식은 스스로 일본군을 탈출해 오거나, 중국군의 포로가 돼 있다가 이양되는 경우 두가지였다.
포로가 돼 있다가 광복군에 인계되는 것은 주로 중경의 임시정부를 통해서였다. 이들이 광복군에 넘겨지기 시작한 것은 45년5월부터였다. 한중 양국간에 '한국광복군 원조변법'이 체결된 뒤의 일이었다. 이 변법이 "중국 각 포로 수용소에 있는 한국인 포로는 한국 광복군에 넘긴다"는 조항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른 첫 조치는 중경의 남천포로수용소에 있던 32명을 45년5월16일 인계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군이 특히 환영하는 알짜배기 자원은 일본군 탈출병들이었을것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대학 이상을 다닌, 당시로서는 국내서도 귀하던 인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이 2지대를 통해 많이 초모된데 비해,이들은 주로 3지대와 9전구 공작대를 통해 광복군으로 편입됐다.두 부대가 이같이 많은 탈출병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때 벌어진 4년만의 큰 전투이자 중국내 최대 전투였던 일본군의 '대륙 타통(타통) 작전' 덕분이었다. 마침 일본군은 이때 우리 학도병들을 막 중국 전선에 투입해 놓고있기도 했다.
일본군과 중국군은 1940~1943년 사이 4년간 거의 대규모 접전 없이 정체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미군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차단당하자 일본군이 육상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이 작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44년5월 시작돼 10월에 끝난 이 전투는 또 중국을 꿰뚫는 남북 종단 철도를 따라 형성된 미군의 공군기지들을 파괴해 일본 본토 공습을 막으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 전투에는 일본군 8개 사단이 투입됐다.
대륙 관통작전로에서 보면 9전구 공작대는 남쪽 일대에 속해 있었고, 3지대는 북부 지역에 상당했다. 그 중 공작대에는 44년10월 처음으로 12명이 탈출해 도착한 것을 시발로 최대 4백명에 이르는 숫자의 한국 청년들이 초모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가 곧바로 중국군 각 부대에 배속됨으로써 8.15를 중국군에서 맞이한다.
탈출 학병들 얘기 중 백미는 역시 3지대에 초모된 김준엽-장준하 선생 등의 것일 터이다. 이들은비슷한 시기에 탈출했다가 3지대를 거쳐 중경 사령부로 보내지고, 다시 서안의 2지대로 배속돼 국내 진공작전 요원으로 양성되는 것이다.
학병 탈출 1호인 김준엽선생은 북부의 서주 부근 일본군 부대에 속해 있다가 탈출, 중국군에 의해발견돼 부양에 있던 김학규 장군의 제3지대로 넘겨진다. 여기서 장준하선생 등 30여명의 학도병과 합류, 인근의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훈련 받은 뒤 44년11월 출발, 45년 1월31일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때의 일들은 '장정'(김준엽)'돌베게'(장준하) 등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렇게 모아져 중경까지 간 청년들은 소위 '토교대(토교대)'라는 보충대에서 머물다 광복군 1지대나 2지대, 임정 청사 경호요원 등으로 배치됐다.토교대는 그것이 토교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이름이었다. 현재 지명은중경시 구룡파구(구룡파구) 화계향(화계향) 신계촌(신계촌). 중경 시내에서기강 가는 길로 20여km 떨어진 곳이었다.
이 지역은 임정 인사들 가족의 거주지였다. 처음 기강을 통해 중경에 입성한 임정 인사들이 얼마 후 옮겨 살기 시작한 곳이다. 기강은 여기서도 50여km를 더 가야하는 먼 곳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당시 임정은 중국진재(진재)위원회로부터 6만원의 원조를 받아 그 중 5천원으로 이곳에 2천여평의 땅을사 집을 지은 뒤 가족들이 살게 했었다.
여기에는 임정 가족들의 가옥 외에 신한교회라는 교회도 있었고, 또 토교대도 운영됐던 것이다.
이곳 토교대는 병력이모아질 때마다 그때그때 임시로 만들어져 운영되는보충대였다. 한시준교수(단국대)는 토교대가 3차례 운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병력이 3번에 걸쳐 중경으로 모여 들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할 터이다.
첫 토교대 편성은 44년3~4월 쯤이었다. 대원은 33명으로, 일본군 관련자가17명, 일반인이 12명, 여자가 2명 등이었는데, 이들은 절반 이상이 5월에 1지대로 보내졌다.
두번째 토교대는 바로 김준엽-장준하 등 탈출병을 위주로 편성된 것이었다. 부양에서 그 먼길을걷다시피해 중경까지 찾아 온 이들 51명은 45년1월31일 도착해 2월20일 토교대로 편성됐다가 4월에 2지대 등으로 보내졌다.세번째 토교대는 석방 포로들을 수용하느라 45년5월에 편성됐다. 32명이었다.
그러나 이 토교마을 역시 그동안 엄청나게 변해 임정 가족들이 생활하고청년들이 훈련 받던 자리는 거의가 큰 공장에 편입돼 있었다. 동파이프를 만든다는 이 공장은 1만평은 돼 보였다. 작년 현재 68세라는 한 동네 노인은이 공장이 58년도에 지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편입부지 안에 교회와 연병장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당시 의무실로 쓰던 건물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이나 이것 역시 작년중에 철거돼 공장이 들어설 것이라고 주민들은 일러줬다. 남아있는 것은 그래도 이 동네를 세로지른 화계 냇가 정도였다. 동행한 중국인 사학자 양부군씨(43)는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얼마전 찾아 와 이 냇가에서 멱감던일을 회고하더라"고 전했다. 이 냇가 건너에는 교포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청화중학이 있었다고 했으나 역시 찾을 길 없었다.
45년 당시 10살이었다는 시영복아주머니는 취재팀에게 토교소학 동기인 한국인 오윤길어린이의 이름과 그 어머니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해 보였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입주할 때 소학생까지 나와 환영회를 하기도 했다고 했다. 여기 살았던 한국인은 일반인 1백여명과 군인 몇십명씩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시아주머니의 말에 당시 8살이었다는 다른 아주머니도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트럼프, 중동상황으로 조기 귀국"…한미정상회담 불발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