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끈 선조들의 슬기(실학)-연암 박지원(하)

입력 1995-09-28 00:00:00

"짐짓 담뱃불을 붙이려는 체하고 부엌에 들어가보니 쉰이 넘어뵈는 추악한용모의 부인네가 인사를 건네왔다. 답례를 한 다음 일부러 오랫동안 재를 파헤치면서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연암이 지은 열하일기중 '도강록' 7월1일자 기사의 일부이다. 연암은 이날폭우가 쏟아져 중국 통원보(통원보)에서 계속 머물게 됐다. 무료해진 연암은일행중 진사 정각 등과 함께 도박을 한다. 이 때 벽을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여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용모가 절세가인이라 어림 짐작한 연암이 슬그머니밖으로 나와 숙소주인 마누라를 관찰한 대목이다.

남녀유별의 유교윤리가 철저하던 당시 이처럼 자신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는 연암의 용기는 놀랍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대목은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장막 안에는 여자 한 사람이 있어 연방 얼굴을 내밀고 내다보았다. 머리를 흰 베로 감쌌으며 자못 아리따운 용모를 지녔다'(성경잡지) '주렴을 사이에 두고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는데 제비나 꾀꼬리가 어여삐 우는 듯하다'(관내정사)

연암의 열하일기는 연행록의 형식을 빌려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려고 한 경세서로 알려져있다.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는 '연암체'를 확립, 우리생각을 우리식 한문표현으로 자유롭게 구사한 저술이다. 이 때문에 열하일기는 당시 사대부들이 다투어 베끼고 빌려보았으며 궁중에까지 들어가 정조대왕도 읽게되었다·인세 한푼 못받는 시절이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초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연암의 글이 당시 문단에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다양한 문체와 소설적 구성 때문이다. 1900년 연암의글을 처음으로 '연암집'으로 공간한 김택영은 "좌전·장자·사기와 같은 선진·양한의 고문은 물론 한유·소식 등 당·송 고문에 나타난 여러 문체를종합해 독특한 일가를 이루었다"며 연암을 평하고 있다. 열하일기에는 패관소설식 문체 또한 뚜렷이 나타나있다. 이 소설적 문체 때문에 연암은 찬사와비난을 함께 받게된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우리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수입, 우리 생각을 표현해야 했다. 고려말 조선초까지 지배층 등 식자층이 주로 사용한 문체는 4자와6자로 이뤄진 '사륙병려문'이었다. 하지만 이 문체는 곧 한계를 드러내 성리학(신유학)이 도입되면서 '사륙병려문'은 '고문'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고문체 역시 의법준수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바람에 사상·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질곡으로 작용한다. 영남대 한문교육과 김혈조교수의 연암체에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우리 생각을 중국문자와 중국식 관념으로 표현하다보니 제약이 많았습니다. 서울을 한양으로 표기하지 못하고 중국 수도인 낙양이나 장안으로 써야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격이 낮은 글로 치부했던 탓입니다. 그러나 연암은고문의 한계를 과감히 탈피해 우리 속담이나 비속어도 한자어로 표현하고 지명·관명을 우리말 한자표기로 하는 등 새로운 문체를 시도했습니다. 연암에이르러 비록 한자 표기지만 우리 생각을 우리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김교수는 이어 "돌아가신 우전 신호열선생은 '연암의 글은 사람이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지만 나는 아직도 잘 지은 글이란 느낌만 가질 뿐그런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다"며 연암예찬론을 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한문학을 우리 한문학으로 토착화시키는데 공헌한 사람으로 연암과 다산을 꼽았다. 산문은 연암이, 한시는 다산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다산시에나오는 '맥령(보릿고개)'는 중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적 표현이란 게김교수의 설명이다. 덕성여대 김명호교수도 "현지 중국인들과의 대화장면을반드시 백화체로 표현,생생한 중국어 회화를 현장에서 듣는 듯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며 열하일기의 소설식 문체를 강조했다.

후학들의 평가는 제쳐두고 연암 본인은 문체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있었을까. 연암도 열하일기중 '곡정필담'에서 중국과 우리의 언어체계가 다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인은 말하는 것이 그대로 문자로 표현되나 우리는 말과 글자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연암이 연행을 다녀온 후 새로운 문체를 시도한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연암의 새로운 문체는 당시 국왕 정조를 비롯 여러 사람으로부터비난을 받게된다. 심지어 손자뻘되는 친척인 박남수가 연암이 북학파들을 모아놓고 열하일기를 낭독할 때 촛불에 원고를 불사르려 했다고 그의 후배인남공철이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특히 정조는 문체반정을 시도하면서 패관소설식 문체가 유행하는 등 문풍이 타락한 주범으로 연암을 지목했다. 이에 대해 김혈조교수는 "문체반정은 노론일파를 억누르고 남인을 등용하기 위한 정조의 왕권강화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조의 문체반정은 곧 흐지부지되고 만다. 문체반정의 대상이었던 노론측이 순정하지 못한 문체를 구사하는 것은 노론계만이 아니라 정조의 총애를 받고있던 남인 이가환의 문체도순정하지 못하다고 역공을 폈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문체반정으로 인해 연암체를 계승하는 문인이나오지 못하게됐다"며 "모든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연암체와 경조부박한 패관소설체는 격이 다르다"고 강조했다.연암은 문체반정의 여파로 그의 문학을 계승하는 후학을 배출하지 못한다.또 그의 북학사상도 이서구·남공철·서유구·김정희 등 제자와 후배들이 순조대 이후 등장한 외척 세도정권을 비판하다 거세당하거나 서로 입장을 달리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좌절의 길을 걷게된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의 전면적 해체와 민중 봉기, 외세의 침략이란 엄청난 격동기를헤쳐가야 했던 이들 후배들에게 연암은 무슨 말을 하고싶을까.〈조영창 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