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속으로**1932년. 우크라이나에는 견디기 어려운 기근이 닥쳤다. 당시 마케예프카에살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도 이 기근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우리들은 무엇이든먹을 것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나 연못에서 수초를 뜯어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먹었던 주식은 아버지가 어디선가 얻어 온 말린 수박 껍질이었다. 끓여 수프로 먹기도 하고 말린 그대로 먹기도 했다. 맛은 지독히 없었다.
놀랄 만한 것도 아니지만, 우연찮은 기회에 내 평생의 유일무이한 교훈을얻게 된다. 어느날 점심때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공장식당에서 고깃덩어리를가져오셨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고기였던지 피가 번들번들하게 묻어 있었지만 군침이 돌았다. 할머니는 못 먹어 눈망울만 둥그런 내가 안스러웠던지내 식탁에 놓아주셨고 나는 포크를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접시를 빼앗아 삼촌앞에 놓으셨다. 삼촌은 물론 그 음식을 거절했으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삼촌이 먹도록 했다.
그리곤 아버지는 나에게 "필립, 화내지 마라. 삼촌은 심한 티푸스를 앓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사람이야. 그가 굶어 죽지 않도록 우리가 돌봐야하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다.
식량 구하기가 무엇보다 힘들었던 그때 그 고깃덩어리는 '마지막 빵 한조각은 가장 약한 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큰 교훈으로 나에게 각인 됐다. 이후고생스런 전쟁중에도 이 말씀은언제나 내 마음의 큰 지주가 됐다. 조직(KGB)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말이 언제나 가슴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은 대체로 모든 인민들의 거대한 조국의 삶 한가운데 서있던위대한 시기였다.
스타하노프운동이 전국에 물결칠 때 동향인 광부 스타하노프는 나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이외 기계기사 끄리보노스, 트랙터 기사 마솨안겔리나, 북극탐험자들의 공적등을 마치 나의 승리인 것처럼 즐거웠다.1937년은 탄압의 파도가 일부 고위급 가족을 제외하고 전 국토를 집어 삼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흥미로운 삶의 한해였다. 이때 우리는기술자 직원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키로프 금속공장에서 일하고계셨다. 한번은 저녁 식사후 어머니가 그릇을 씻고 계실때 아버지가 나를 불러 조용하지만 매우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필립, 너는 이미 12세이며 남성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야. 나는 내가 체포될 수도 있다는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한다. 그러나 나는 인민들 앞에나 동료들에게 결코 죄지은 일이 없으며 내 양심은 깨끗하다는 것을 명심하렴"나는 혼란스러웠다. 무엇때문에 아버지를 체포한다는 말인가. 정직하고 존경받는 아버지를. 이전에는 전혀 그와 같은 의심이 들지 않았었다. 그제서야우리가 살고 있는 32층짜리 아파트에 대여섯명의 남자들만 빼고 모두 체포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체포되는 대신 아버지는 공장에서 해직됐고 근 일년간 실업자 생활을 했다. 지방신문에서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를 비난하는 기사로 가득찼다. 밤마다 어머니는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때 마다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뛰어가곤 했다. 우리 가족에게 공포가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빵을 사기 위해 우리는 책이랑 잡기들을 내다 팔아야 했다. 다행히 불행은더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고 비껴 지나갔다.
그러나 그 해는 평생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진정 인민의 적은 누구인가. 많은 세월이 지나 조직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 반역자를 처단해야 할때도 나는 탄압에 의하지 않는 다른 방법들을 찾게 됐다. 그리고 종종 그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1941년 6월 22일 '내조국전쟁'(히틀러 소련침공 전쟁)이 시작돼 10월에는돈바스로 독일군이 다가왔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성급하게 물러섰고 도시사령부도 철수했다. 마케예프카는 완전히 치안부재 상태가 됐으며 약탈병이나타나 창고와 상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공포에 휩싸인 주민들은 자기 집에 틀어박혀 숨도 쉬지 못했다. 이때 보았던 약탈과 광폭의 무시무시한 장면은 평생동안 잊을수 없는 악몽으로 나를괴롭혔다. 이때 두가지 에피소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약탈과 살인,방화의 상태에서 어느날 친구들과 나는 빵을 찾으러 아침 일찍 도시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귀를 멀게할 정도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수백명의 약탈자들이 흥분한채 우리쪽으로 질주해오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숨기위해 옷가게가 밀집한 부근 인드뽀쉬바 아틀리에 건물 출입구로 피신했다. 그러나 약탈병들은곧장 이곳으로 질주해와 우리를 거칠게 아틀리에 방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총개머리로 얼굴을 강타했다. 아프다고느끼기도 전에 입안에 진득한 피가 가득 고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탈취됐다. 완성되지 않은 옷과 포목,재단 재료,찢어진 커튼,안락의자,소파등 모조리 긁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재단사들이 가져다 놓은반짝이는 돌,노리개까지 가져갔다. 우리는 마루바닥에 피를두둑 두둑 흘리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을 보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도 작은 질서가 유지됐던 곳이다.
이 사건이 있고 얼마 뒤. 우리는 친구중 한 사람의 아파트에서 밤을 지낸적이 있다. 그 창문은 이웃 공장 주방(당시는 노동자식당으로 불렸다)의 정원으로 나 있었고 정원에는 돼지우리가 있었다. 잠이 얼핏 들었을까 날카로운 돼지 우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잠을 깼다. 눈앞에 무시무시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돼지 우리가 약탈당하고 있었던 것이다.몽둥이와 쇠꼬챙이로 닥치는 대로 돼지를 두들겨 패고,찌르고 있었다. 더러운 돼지의 검은 털 사이로 피와 내용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비릿한냄새와 함께 돼지의 울음소리가 밤새 나를 괴롭혔다.
마케예프카에서의 약탈장면은 오늘날에도 눈앞에 선하다. 나중에 전쟁을치르면서 수많은 무질서와 소요를 보았지만 이때 보았던 약탈만큼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이것을 반복된 경험의 이성 둔화라고 할까.
우리 가족은 철수병을 쫓아 가기로 했다. 그러나 가족의 충고에 따라 어머니와 할머니,동생은 남아 어딘가에 있을 법한 아파트에서 연명하기로 했다.걸어 가다가 운 좋으면 열차를 훔쳐 타기도 하고 철수장비가 있는 플랫폼에서 자기도 했다. 돈바스는 독일군의 침공으로 말 그대로 초토화된 아비규환이었다.
11월 7일 거의 녹초가된 몸으로 우리는 스탈린그라드에 입성(?)했다. 도시는 피난민들로 가득차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여기서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또 다른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다음편에 계속)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