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사령부**겨우 모습만 갖춰 소대 규모로 출발한 광복군이 본격적으로 발전을 시작하는 기점은 창립 4개월만이던 41년1월이었다. 첫 좋은 징조는 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으로 편입해 들어온 것이었다.
**전지공작대 합류**
이 시리즈 앞회분에서살핀 아나키스트 청년들의 전지공작대는 아주 뛰어난 활동으로 40년 말에는 이미 그 규모가 1백명에 달하고 있었다. 이를 광복군과 단순 비교한다면, 명색이 한국 정부군이자 총사령부까지 갖춘 이 시점광복군 보다도 규모가 2배나 됐던 셈이다. 공작대는 39년말 28명으로 창설돼6개월 후인 40년5월에 병력 초모를 시작, 다음 7개월 동안에만 60명 이상을모았던 것이다.임정이나 김원봉 계열의 의용대에서 서로 끌어들이려 했던이유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한 것은 광복군이 생긴 뒤 가장 큰경사였다. 이들은 41년1월1일 서안의 자체 본부에서 신년 단배식을 끝낸 다음 광복군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편입 선서식을 가졌다. 이로써 30~40명의광복군이 일단 1백30명 이상 규모로 확장됐다. 이들이 4지대가 아닌 5지대가된 것은 4라는 숫자를 기피하는 관습 때문이었다.
이어 3월에는 중국군에 있던 김문호가 스스로 임정으로 찾아와 광복군 편입을 자원했다. 이렇게 해서 그를 중심으로 또하나의 징모분처가 3월1일 추가 편성됐다. 1지대가 1징모분처, 2지대가 2징모분처가 됐던데 이어 이들은3징모분처로 명명됐다. 5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직후 강서성 상요(상요)에 사령부를 둔 중국군 제3전구 지역으로 파견 나가 곧이어 20여명의 추가 병력을확보하고 광복 때까지 활동을 계속한다.
같은 시기에 1지대(1징모분처)와 2지대(2징모분처)도 모두 서안을 떠나 적진으로 초모 공작을 나갔다. 이준식 지대장 등 1지대원 9명 전원은 3월에 중국 2전구 지역이던 산서성으로 이동해 가 태원-석가장 등에서 1년 동안 활동했다.
공진원 지휘하의 2지대원 6명 전원도 이보다 며칠 앞서 수원성(수원성) 포두(포두)로 이동했다. 그러나 2지대는 공작이 일본군에 탐지돼 1명의 대원을잃은 채 이해 겨울 서안으로 철수하기도 한다.
이름만 있던 3지대는 일년 뒤인 42년도에야 병력이 충원된 듯 이해 4월 김학규 지대장 이하 8명이 6징모분처로 편성돼 중국군 5전구 지역인 안휘성(안휘성) 부양(부양)으로 출발한다.
**중국 지휘권 앗아**
이렇게 41년도 들어 병력도 1백30명을 넘고,활동도 본격화한 광복군은 그러나 11월이 되면서는 임시정부가 아닌 중국군 산하 부대로 변질된다. 11월15일 중국측으로부터 중국군 지휘 아래로 편입하라는 일방적 통고를 받은것이었다.
중국측의 태도가 이같이 경색되게 된데는 이해 들어 발생한 조선의용대의월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명백히 중국군 산하 부대로 규정돼 자금 지원을 받으며 출범했던 김원봉 계열의 이 군대가 이해 3~5월 사이 공산군 세력으로 넘어가자 광복군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생긴 장개석이 10월15일 전격적으로 그같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중국측은11월15일 '9개준승'이라는 것을 제시, 중국군 예속을 요구한 것이었다.임정측은 가슴이 쓰리면서도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임정 인사들은 이때의심정을 '인통접수(인통접수)'라고 적었다. 통한을 씹으면서 받아들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광복군의 상황은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했다. 병력이 늘어나는 것은 좋으나 그럴수록 경비가 많이 필요해지고, 중국측이 승인 없이 만들었다고 해서 광복군의 활동조차 제대로 못하게 묶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훨씬 늘었다. 매월 2만원 정도가 지원된 것이었다. 이는 당시 돈으로 2천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연구돼있다. 또 우리 광복군에게는 중국군 장교에 준하는 월급이 지급됐다.중국측은 42년3월 이후부터 9개준승에 기초한 각종 지휘 조치들을 취하기시작했다. 부대 편제도 완전히 바꾸고, 사령부에는 중국군 장교를 엄청나게많이 파견해 실권을 거머쥐었다.이범석이 맡았던 참모장 자리도 그들이 차지했다. 42년 현재 통계로 사령부 45명의 장교 중에선 중국인 장교가 33명으로 우리측 12명 보다 월등히 많았다. 말단부대까지 포함한 45년 통계로도 전체 광복군 장교 1백17명중 한국인이 52명이었던데 반해 중국인은 65명이나됐다.
그러면서 43년5월에는 광복군에 대한 일제 조사를 실시, 한국인들의 성향까지 검색했다.
**45년 통수권 환수**
광복군에 대한 중국군의 관장은 45년2월까지 계속됐다. 이때 통수권이 임정으로 되돌려졌던 것이다. 이범석이 맡았다가 중국인에게 내어준 참모장 자리도 45년6월1일 김홍일장군이 부임함으로써 한국인에게 환원됐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년도에 귀주강무당에 입학함으로써 중국에서의 군인 생활을시작했고, 이미 32년도의 윤봉길의거 때 폭탄을 만들어 주는가 하면, 조선의용대 창설요원들의 교육 때 교관을 맡는 등 우리 독립운동계와 깊은 연고를갖고 있던 김홍일은 중국군에 있으면서 37년도에 소장으로까지 진급해 있던중이었다.
이같은 여러 문제는 다음에 또 한번 다루겠지만, 지휘권이 중국으로 넘겨지면서 광복군 사령부가 서안에서 중경으로 이동됐던 것도 큰 변화 중 하나였다. 사령부는 중국측의 요구로 42년9월, 2년여간의 서안 생활을 마치고 중경으로 돌아갔다.
이런 사연을 안은 서안의 사령부 건물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복 50주년된올해에 철거돼 버렸다.
**청군 서경사령부**
서안사령부가 자리 잡았던 곳은 서안시 연호구(연호구)이부가(이부가)4호,현재의 서안시청 바로 옆이었다.당시 중국군 트럭 2대를 빌려 사령부 병력을 중경에서 이곳으로 인솔했다는 조경한선생의 백강회고록에 따르면, 이곳은 본래 청나라 군대의 서경(서경)사령부터였다. 대지가 2만여평이고 건물이3백여칸 되는 큰 군영이었다. 이것을 중국군사위원회 서안 행영(행영)에 의뢰해 빌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본기의 심한 폭격으로 1백여칸은 파괴되고나머지도 거의 파괴 지경이었다고 백강은 회고했다.
이 가운데 사령부 사무실이 있던 곳은 그동안의 변화에도 다행히 견뎌, 작년 7월 취재팀이 찾아 갔을 때까지만 해도 본래 모습을 보전하고 있었다. 당시 마평(48)이라는 영화사 세팅 기술자가 주인이던 이 집은 대지 73평에 각층 3칸씩의 건평 85평짜리 2층집이었다. 마씨는 83년도에 이 집을 구입, 1층은 탁아소, 2층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집은 지금은 뜯기고없을 것이다. 취재팀이 갔을 때 마씨는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고 귀띔을 해 줬었다. '연호구(연호구)경제건설위원회'에서 이 일대에 거대한 주상 복합건물을 세우기로 결정, 그 부지로 편입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년 12월까지는 집이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였다.이 귀한 광복군 유적이 없어져서야 되겠나 싶어 마음이 급해진 취재팀은이 철거 계획을 곧바로 매일신문에 보도하고, 귀국해서는 국가보훈처와 광복군동지회에 전화로도 통보했다. 그러나 보훈처 담당자라는 사람의 태도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게 어디 있는 무엇이냐"는 투의 달갑잖다는 태도는 오히려 애국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다른 전화가 와 있으니 얼른 전화 끊고 네 볼일이나 보라"는 식으로까지 나가는데는 정말 할말이 없었다.성이 손씨라는 이 담당자 덕분에 이 건물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이되고 말았음에 틀림 없다. 작년 11월에 주인 마평씨는 철거가 시작됐음을 편지로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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