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증언한다 광복50년...전일본군 위안부 수기(7)

입력 1995-08-26 08:00:00

거기서 며칠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주변이 시끌시끌하더니 배가왔다고 야단들이었다. "살려면 타라"는 소리도 들렸다.대만까지 끌려와 위안부생활을 강요당한 것이 철천지 한이 된 나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라는 말도 얼른 믿겨지지가 않아 안타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서둘러 타길래 할 수없이 나도 배에 올랐다. 멀미와 불안감에 시달리던어느날 "부산이 보인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멀리 둔덕에 파란 물감이 칠해져 있는듯 했다. '혹시 대만에 되돌아온건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조선말이 들리자 마음이 놓였다. 우리들은 모두 서로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배에서 내리니 누군가가 머리에 허연 약을 뿌리고 돈 3백원을 손에 쥐어주었다.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도착했다. 다 찌그러진 초가 그대로였다. 저녁무렵이었는데 마루를 닦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종훈아, 오늘 누나 제삿날인데 조포(두부) 사오너라"는 소리도 들렸다. 가슴이 터질듯해 "엄마!"를부르며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귀신인줄 아셨던지"우리딸 죽은지 오래됐심더. 오늘이 제삿날입니더"하시더니 훌쩍 방안으로 들어가셨다. "엄마, 용수다"하고 말하니 그만 기절을 하셨다. 마침 아버지가 오시길래 "아부지"하고부르니 "내가 헛거를 봤제. 보고싶어했더니 혼령이 왔구나"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렇게 하여 다시 고향에 돌아왔지만 한번 크게 입은 상처는 결코 아물지를 않았다. 가족들에겐 내가 어디가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았다.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고명딸 시집도 못보낸채 눈감는다고 애통해하셨다.

광복 50년이 됐지만 아직도 나는 그때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전기고문당한 손은 몇차례의 수술에도 완쾌되지 않고 귀에는 소리가 나며 늘 삭신이 아프다. 정신대로끌려간 우리들의 지난날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꽃같은나이에 끌려가 마구 짓밟혔고해방후 고향에 돌아와서는 서럽고 한맺힌 삶을살아왔다. 다행히 몇년전부터 정부에서 월20만원의 보조금과 영구임대아파트등을 제공해줘 한결 살기가 나아졌지만 망가진 인생에 대한 한은 갈수록 깊어만간다.

우리에겐 죽기전 꼭 풀어야할 숙제가 있다. 일본정부로부터 사죄를 받아내는 일이다. 그간 몇차례일본에서 증언과 시위를 할때마다 양심적인 일본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했지만 일본정부는 한마디의 공식사죄 없이 민간기금조성이니 어쩌니하면서 얼버무리곤했다. 지난 8.15때 우리들 몇사람은 무라야마총리와 만났다. 그가우리들의 손을 잡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반분은 풀렸지만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고서는 우리들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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