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전 '한서린 주먹밥'-백발 여고동창생 한자리에

입력 1995-08-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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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린 주먹밥'사진 한장이 70대 할머니가 된 여학교동창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귀밑 솜털이 뽀얗게 나 있던 17세 여학생들이 이젠 백발이 성성한 70대 할머니가 돼 다시 만났다. 그러나 기숙사 옆 양지바른 곳에 모여 재잘대던 꿈많은 소녀의 모습은 비록 희끗한 눈섶 밑이지만 들떠 있는 눈빛에 그대로 소복이 담겨 있다.

신명여학교 30회 졸업생(1942년 졸업)인 배혜원씨(71·대구시 수성구 파동)는 55년전 자신이 담긴 사진을 보며 잠시 회한이 든듯 말을 잊는다. 그러나 이내 동기생들과 당시 사진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15일자 보도를 접하고 동기생 5명이 18일 한자리에 모인 것.

"전쟁통에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로 올라와 주먹밥을 먹였지요"

마침 이때 지금은 복개된 대구천이 수성못둑 붕괴로 범람, 주변 인가를 휩쓸자 당장 잠잘곳조차 없어진 동네아이들이 성경학교(현 제일교회)로 몰려왔다. 당시기숙사생활을 하며 부족하나마 주먹밥을 만들어 굶주린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이들의 모습을 한 선교사가 사진에 담은 것이다.이때 식량난으로 기숙사 식사는 항상 양이 적었으며 그 때문에 늘 배가 고팠다고 최화씨(71·경북 칠곡군 가창)는 회고한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며 식민지수탈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5명의 여고동기생의 시선은 사진속의 조갑교에게로 몰리면서 잠시 숙연해진다.졸업하고 얼마되지 않아 결혼한 그녀는 46년 해산하다 아기와 함께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예쁘고 주먹밥 나눠주던 고운 마음씨가…" 같이 찍은 사진이 없는탓에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또 본다. 그 옆으로 개성출신사감과 궂은 일 마다않던 이숙사(숙사)등 모두 까맣게 잊고 지내던 정겨운이의 모습이다. "지금은 다 돌아가셨겠지…" 김일순(72·대구시 대봉동)씨가힘없이 말한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 황국신민화 교육이 악랄히 자행되던 때라 광복 50주년을 맞는 느낌도 남다르다. "우리 학교는 일제 식민지에 대한 반발이 다른 어느 학교보다 강했습니다" 이장숙씨(71·대구시 중구 대봉동)는 신명여학교가주체성이 남달랐다고 말한다. 당시 다른 학교와는 달리 교과시간표에 일본어를 국어라고 표현하지않고 일본어라고 적어두었다가 일제의 미움을 사 폐교될 위기에 놓였던 일은아직도 흥분된다. '황국신민서사''천황교육칙어'를달달 외우게 하던 일제 교육에 반감이 든 것은 이규원교무주임(작고,전성광고 교장)등 조선인 선생님들의 민족의식 고취때문이었다고 서정일씨(71·대구시 남구 이천동)는 회고한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는 끝이 없다. 여고동창생 희,숙,정의 이름이 나오고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버린 친구들의 이름도 나온다. 지금은 너무나 아득한그러나 그리운그 시절이다. 55년전 사진 한장이 70대 여고동창생들을 심훈의'상록수' '흙'(이광수)을 읽던 꿈많던 시절로 되돌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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