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동지회'분노.회한의 50면투쟁, "학도병 보상 반드시 해결"

입력 1995-08-16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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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여 전장으로 ㄱ라. 반도의 학도여 전장으로 가라. 반도학도의 힘찬거보는 내 드디여젓다. 조선특별지원병제 실시의 광영에 3천리강산은 물끌엇다'1943년 '조광'12월호에 게재된 일제의 학도병 격려문이다.태평양전쟁에 강제징집된 조선학도병 모임인 '1.20동지회'(회장 이광우).이들은 지난 50년을 분노와 회한으로 보내왔다.그러나 광복50주년을 맞는 올해는 감회가 다르다. 그동안 추진해온 일본야스쿠니(정국)신사의 한국희생자영령봉환과 위령탑건립사업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20대 홍안의 학도병으로 죽음의 길로 내몰렸던 이들은 이제 70.80대의 노인으로 변했고 동지회원들도 매년 줄어 지금은 서울의 중앙회를 비롯 전국에고작 2백~3백명에 그치고 있다.

일본열도에 남아있는 태평양전쟁 희생 한국인 영령들의 봉환과 이들을 추모하기위한 위령탑 건립, 그리고 일본의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간 자신들의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문제의 해결은 살아있는 동안 꼭 마무리하고싶은 일이었다.

일본 야스쿠니(정국) 신사에 있는 한국인 희생자들의 영령을 고향땅으로되찾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에만도 2만1천1백82위의 한국인 위패가 있습니다"고 밝힌 1.20동지회 중앙회 부회장 정기영씨(76)는 지난 6월일본 학도병출신인 다나카, 다카하시씨 등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의최고책임자인 오니시 궁사를 찾아가 1주일간 집요하게 설득, 정부도 하지못한 일을 '1.20동지회'가 마침내 돌려주겠다는 확답을 얻어냈다는 것이다.야스쿠니로서는 미증유의 대사건(?)이었다.

1백26년의 야스쿠니 역사상 이곳에 안치된 영령을 신사바깥으로 내보낸적이 이제껏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령봉환을 앞두고 '1.20동지회'는 부산시로부터 두구동의 공원묘지인영락원의 부지 1백10평을 납골당과 위령탑 건립부지로 제공받았다.약 3억2천만원의 건립비용은 지난 67년 정씨가재산을 헌납, 1.20동지회회원들이 주축을 이뤄 만든 재단법인 부산영원이소유하고 있는 진주의 땅62만5천평을 팔아 충당, 오는 9월쯤 착공할 계획이다.

보상문제는 지난 92년부터 4년째 동경지방법원에 소송이 걸려있다. 강제징병, 징용자와 학도병, 정신대피해자 등41명이 원고로 돼있는 태평양전쟁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이다. 일본인 변호사 12명이 변호를 맡아 지난6월12일 제13차 공판까지진행됐다. 이 소송에 학도병출신은 정씨와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당한 학도병(유족이대신하여) 등 생존자 1명과 사망자 1명이 시범케이스로 소송을 제기해 있는 상태이다. 일본 사법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힘들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자신들의명예회복을 위해 끝까지 싸운다는 각오이다.

1.20동지들은 전장에 끌려간지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1943년 10월1일,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이일본육군성령으로 공포되면서 대학문이 폐쇄됐고 학생들은 몸을 숨겼다. 일경은 가족들을 고문하고 공직에서 추방하는 등 탄압을 자행했다.마침내 1944년 1월20일, 대학생 4천3백85명(미확인집계)이 징집돼 일본,중국, 필리핀, 버마 등 전선으로 내보내졌다. 그들중엔 강영훈, 현승종 전총리, 김수환추기경,오탁근 전법무장관 등 해방이후 우리사회를 이끈 지도자들이 수두룩했다. 특히 대구,경북출신들이 많았다.

학도병강제징집등 각종 일제의보상문제는 이제 문민정부가 앞장서 풀어주기를 광복 50돌을 맞는 1.20동지회원들은 기대하고 있다. 〈전경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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