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징명 '시베리아 삭풍회'

입력 1995-08-14 08:00:00

"우리에게 광복50주년은 대일투쟁의 시작일 뿐입니다. 결코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광복50주년을 하루앞두고 오늘도 외롭게 일본을 상대로 '총성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시베리아삭풍회'사람들.

정신대피해자도 아니요 항일독립투사도 아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물론일본정부에서도 모르는 체 귀찮아하는 사람들.

이들은 2차세계대전의 말기인 지난44년부터 이듬해 8월 일본의 항복직전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징병됐다 풀려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20대의 젊은이들. 지금은 머리끝이 희끗해버린 70대의 징병한인생존자들.45년 8월15일일본의 항복으로 조국은 광복을 찾았으나 이들은 일본군과함께 소련군의 포로신세로 또다시 3년~5년간을 시베리아동토에서 착취와 강제노역에 청춘을 보냈다.

"삭풍회는 생존징병자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제항복이후이뤄진 강제노역에 대한 일본의 배상청구와 저들의 죄과를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북영일에서 태어나 대구수창국교와 대구농림고를 졸업한뒤 45년 3월에징집됐던 삭풍회 김일용회장(71·경기도 안양시 동안구호계동 샘마을 임광아파트)의 설명이다.

징병자들의 포로기간에 대한 군인봉급은 광복이후 일본군소속으로 이뤄졌기에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시 합의된 배상금과도 무관해 별도지급돼야 한다는 것.

게다가 일본인군인에게는 정착금을 지급하면서도 한인징병군인들에게는 정신적 육체적 피해등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음은 부당하는 것이다.조선인징병자 3천여명은 종전뒤 포로생활을 하다 48년 12월 북한군에 인계, 흥남 부두에 내렸을 때는 2천3백여명으로 줄었다.

북한출신들은 즉시 귀향조치됐으나 남한출신 4백50여명은 북한군의 심사뒤49년1월 걸어서 38선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조국은 이들을 반기지 않았다. 소련과 북한을 거쳤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아 또다시 인천의 임시수용소에서 수용됐다 3월께야 풀려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회장도 49년5월 당시 경북출신 징병생존자 44명과 함께경북도청을 방문, 도지사등 관계자들에게 자신들의 생환경위등을 설명하기도했다.

남한출신 징병생존자 4백50명중 일부는 6·25전쟁에 또다시 징집, 희생돼연락닿는 생존자는 많지 않아 현재 삭풍회회원은 전국에 46명뿐이다.징병생존자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박상규씨(72·서울)는 "징병자들은 독립군처럼 대접은 고사하고 최근까지 항상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아 늘 그늘에 숨어지내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가족들에게는 물론 주위사람들에게 당당히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어 마음고생을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며 원봉재씨(71·서울)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따라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정부와 언론은 물론이고 어느누구도 관심을기울이지 않은데다 세월은 흘러 생존자들마저 역사속으로 사라져만 갔다.김회장등 삭풍회회원들은 모임결성뒤 본격활동에 들어가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회원45명이 포로노동사실증명서류를 받거나(33명) 확인(12명)받았다.이를 근거로 김회장등은 지난94년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냈으나 개인차원의해결외는 방법이 없다는 회신에 실망, 전회원이 직접 해결에 발벗고 나섰다.정인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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