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사 후예-왕산 허위선생 손자 경성씨

입력 1995-08-14 08:00:00

"왜놈들은 정치·군사적으로 더욱 강성해지기만 하는데도 요즘 세대는 선열들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아 큰일입니다"항일 의병장의 후손인허경성씨(69·대구시 북구 산격3동)는 광복 50년을맞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허씨의 조부는한말 대표적 의병장인 왕산(왕산) 허위(허위)선생(1855~1908).

경북 구미시 구미면 임은리(임은리)에서 출생한 허위선생은 십삼도창의대진소의 군사장이 돼 1908년 1월15일 서울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하는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일본군에 잡혀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이등박문이오,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하면서 순국하기까지 선비의 기개와의연함을 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이 풍비박산 됐지요. 의병장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일제는 온갖 탄압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많은 가족들이 만주로떠났어요"

시련에도 오히려 임은(임은) 허(허)씨들은 왕산선생의 항일정신을 이어받아 더욱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허위선생의 장형인 방산(방산) 허훈(허훈)선생은 소유토지 3천여두락을 팔아아우인성산(성산) 허노(허노)선생과 허위선생의 의병활동에 군자금으로 보탰다. 또 청송에서는 의병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방산선생의 손자인 허종(종)은 독립단체인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다. 증손자가 대구시장을 지낸 허흡(허흡)씨다.

허위선생의 중형(중형)인 허노선생은 만주로 망명,이름을 혁(혁)으로 바꾸고 서간도에서 결성된항일단체 부민단(부민단:서로군정서의 모체) 초대단장에 취임했다. 이후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90세이던1940년 북만주 주하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허위선생과 종반간인 범산(범산) 허형(허형)선생은 을사오적 자살사건에가담했으며 범산선생의 아들인 발(? )과 규(규)도만주와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또 허위선생의 장남인 학(학)은 항일단체인 독립의군부(독립의군부)에서활동하다 만주로 망명,일송 김동삼선생 등과 항일인재를 양성 중 일경에 잡혀 시베리아에서 목숨을 잃었다.

특히 허위선생의 종조카인 허형식(허형식:족보에는 극)은 항일연군 제3로군의 참모장겸 3군 군장이 돼 1940년부터 1년여동안 북만주에서 일본경찰등1천5백여명을 사로잡고 5백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용장이었다.또 왕산선생의 손자인 허진(허진:웅배)은 김일성과 같이 항일운동을 하다 현재소련에 거주하고 있다.

허경성씨는 "만주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 살면서 할아버지의 항일정신을결코 잊지 않았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임은 허씨 집안의 항일운동사를쳬계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며 '국역왕산전서'를 움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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