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1백년전인 1895년 8월. 명성황후(명성황후)가 일본낭인들에의해 무참히 시해됐다. 이해말에는 단발령(단발령)이 내렸다. 국모(국모)가시해되고 목숨 같이 귀중히 여기던 상투가 잘리는데도 조선정부는 무력하기만 했다. 믿을 것은 백성의 힘뿐이었다.전국에서 의병(의병)이 일어났다. 의병봉기는 해방된 1945년까지 약 50년동안 타올랐던 항일투쟁의 서곡이었다. 대구·경북 출신 의병장 중 이름을드날린사람은 이강년(이강년-문경) 허위(허위-선산)선생, 정환직(정환직)정용기(정용기)부자(부자) 의병대장(영천), 김하락(김하락-의성) 신돌석(신돌석-영해) 장윤덕(장윤덕-예천)노병대(노병대-상주) 신태식(신태식-문경)장군등이다.
운강(운강) 이강년선생(1859~1908)은 경상도는 물론 충청 강원 경기 일대에서 50여차례나 전투를 치른 유격전의 명수였다. 특히 1907년 10월22일 충북 제천 신림전투에서 적 2백여명을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3도의병이 모인 자리에서 이강년선생은 호서(호서) 창의대장으로 뽑혔다. 일본군에 잡혀 1908년 10월13일 순절하면서 다음의 시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오십평생 목숨던져 싸워 온 마음/죽음에 임하여 구차히 구하지 않는 이 마음/맹세하고 두번 나섰지만 마침내 못 찾은 나라/땅속에도 간직할 칼날 같은 마음'
정환직선생은 의병장인 아들 용기가 1907년 10월 영일군 죽장면에서 일본수비대와 전투 중 목숨을 잃자 아들에 이어 의병대장이 돼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1907년 12월 일본군에 잡혀 64세의 나이로 총살당했다. '몸이 간들 마음이야 변할소냐/의가 무거우니 죽음 오히려 가볍구나/뒷일을 뉘에게맡길까/새벽에 홀로 앉아 말을 잊었노라'는 절명시를 남기고.경주등지에서 활약한 김하락 장군은 1896년 7월14일 강구에서 전투를 하다어깨에 총상을 입어 싸울 수 없게 되자 부하들과 함께 오십천에 몸을 던져자결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33개월동안 의병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을 가장 공포에 떨게 했던 신돌석 장군은 1907~1908년 영양 영해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신장군이 활동하는 지역에는 일본군이 헌병분파소를 두지 못했다는데서 장군의 용맹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장군은 1908년 12월 현상금에 눈이 먼 동족의 손에의해 31세의 나이로 한많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의병장을 따라 목숨을 던진 의병은 수없이 많았다. 경북고등경찰 기록에따르면 1907년 8월부터 1910년 12월까지 의병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경북사람이 1천3백84명,부상자가 5백82명이었다.
위암(위암) 장지연(장지연-상주)선생은1905년 11월2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애고국민'이란 글을 발표, 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국권회복 운동을 촉발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항거한 지사도 잇따랐다. 유병헌(유병헌-칠곡) 장기석(장기석-성주) 이만도(이만도-안동) 김도현(김도현-영덕)선생등은 의로운 죽음을 택해 민족의 가슴에 항일의 불씨를 심어 주었다.
또 1907년 1월 대구에서 단연회(단연회)가 조직된 것을 시발로 일제에게진 1천3백만원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국채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서상돈(서상돈) 김광제(김광제)선생등을 중심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후일 신간회가 주도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지대한 영향을주기도 했다.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돼활약했다. 1909년에 결성돼 1943년에야 탄로난 대동청년단(대동청년단)은 교육 문화사업을 통한 민족갱생에 힘썼다. 이 단체에서는 안희제(안희제) 김동삼(김동삼) 남형우(남형우)선생등 경상도 인물이 중심이 됐다.경북 풍기에서 채기중(채기중)유창순(유창순)선생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대한광복단)에 박상진(박상진-경주)의사 등이 합류해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대한광복회)가 조직됐다. 광복회(총사령 박상진)는 친일파 처단, 군자금 조달등 많은활약을 했다. 1917년 12월 광복회 회원들은 동료의 밀고로일제에 검거됐다. 1921년 8월 박상진의사가 대구형무소에서 38세의 나이로교수형을 당하는등 회원6명이 목숨을 잃었다. 허위선생의 제자인 박의사는스승의 뒤를 이어 순국했던 것이다. 박의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당시의심정을 토로했다.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세상에/다행히 남자몸 되었지만/무엇하나 이루지 못하고 가나니/청산이 비웃고 녹수가 꾸짖는구나'〈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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