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 남산면 청년들의 '대왕산 항쟁'은 민족의 해방을 앞둔 1944년7월일본의 강제징용에 반대, 죽장과돌멩이로 총칼에 맞서 싸운 23일간의 대투쟁으로 왜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이었다.대동아 전쟁으로 다급해진 일제의 만행에 분개, 조국광복을 염원하던 차안창률씨를 중심으로 한몇명의 동지들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개죽음을 당할수 없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동지규합에 나서 29명의 청년들이 일제와 싸우기로 결심하고 3개소대, 1개 특공대, 1개 정보연락대를 조직했다.이들은 왜경의 눈을 피해 모의를 하느라고 충분한 식량을 준비하지 못하고도끼 톱 낫 등으로 왜경과 싸울 죽창을 만들어 해발 9백5m 대왕산으로 입산했다.
대왕산에서 첫밤을 보낸 의거부대는 먼동이 트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터져라 외치며 나라없는 설움에 통곡하며 '일본은 망한다. 우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징병을 반대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목숨을 끊는다'는 결의와함게 당시 신축중인 남산주재소를 파괴키로 했다.
대왕산에 의거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왜경들은 투항을 설득하다 실패하자 총을 쏘아댔고 의사들은 산꼭대기에서 돌을 굴리고 던지는접전이 벌어졌다.
이들의 저항에 굴복한 왜경들은 대구 80연대 지원을 받아 비행기로 정찰을계속하면서 주민들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 가족들을 앞세워 자수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의거부대는 3개 분대로 분산, 주재소를 습격키로 했으나 식량이 떨어지자 일부 특공대원들은 8월6일 대왕산에서 재집결을 약속하고 하산, 가족들의 도움으로 식량을 구해 나섰지만 1주일만에 모두 체포됐다.지사들은 경산경찰서에서 50여일간에 걸쳐 옷을 벗긴채 거꾸로 매달려 고춧가루물을 코에 넣고 전기고문과 취조로 온갖 고문을 당한뒤 대구형무소로이감되었다.
이들은 폭력행위 위반,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수감돼 안창율대장과 김경화 지사는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고, 박재달, 박재천지사는 해방을 두달앞두고 병보석으로 출감, 나머지는 해방과 함께 출옥했으나 지금까지 생존자는 김특술(72) 박혜광(75) 최동식(69) 이종태 의사(79)등4명 뿐이다.
대왕산 항쟁은 그 후 후손들의 노력에 힘입어 지난 86년 29명의 지사중 22명이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게 되었다. 〈경산·최봉국기자〉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TK를 제조·첨단 산업 지역으로"…李 청사진에 기대감도 들썩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민주 "김민석 흠집내기 도 넘었다…인사청문회법 개정 추진"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