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끈 선조들의 슬기 실학(23)-여암 신경준

입력 1995-08-03 00:00:00

여암 신경준은 여러 실학자중에서도 가장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학문연구를 한 실학자로 평가되고있다. 이 때문에 위당 정인보는 '신여암 고택방문기'에서 "여암을 제치고는 비록 성호 이익과 농포 정상기의 거학으로도오히려 고적 삭막을 느낀다"고 할 정도였다. 여암의 평생 지기였던 대제학홍양호도 '여암 묘비명'에서 "여암은 구류이교(한나라 때 학문을 아홉 가지로 나누어 일컫는 말로 구류는 유가.도가.음양가.법가.명가.묵가.잡가.종횡가.농가를 말하고 이교는 노자의 교와 불교)의 학설에 정통하고천문.지리.시문.의학.복서의 학문과 해외의 기벽한 글에서 깊고 요긴한 점을 끌어내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여암은 숙종38년(1712년) 고추장의 고장으로 유명한 전북 순창 남산대에서 진사 신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10대조는 신말주로 세조때의 명신신숙주의 동생이다.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처가가 있던 순창 남산대로 은거해버렸다. 신말주는 남산대에 귀래정이란 정자를지었는데 지금도 순창에 남아있다. 여암도 10대조 말주의 부인 설씨가 태어난 남산대에서 세상에 나왔다.

여암은 네 살때부터 천자문과 시경을 읽는 등 천재성을 보였지만 가정환경은 불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년에 순창 남산대에서 쓴 '남산 구려기'에는 여덟 살때 고향을 떠나 서울과 강화도에서 공부한 것으로돼있다.열두 살때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스물 한 살무렵 다시 경기도 소사, 충청도 직산 등지를 전전하다 다시 귀향한 것으로 기록하고있다. 이 때 그는 사물의 존재원리를 인식하는 이론을 설파한 '소사문답'과 '직서'를 썼다. 이후 그는 39세때인 영조26년(1750년) 그의 가장 탁월한 학문적 업적의 하나로 평가받고있는 '훈민정음 운해'를 지어 언어학자로서 그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여암은 43세때에야 뒤늦게 벼슬길에 나갔다. 이후 그는 성균관 전적, 예조와 병조의 낭관, 사간원 정언과 순천.강계부사, 제주목사 등 여러 관직을거쳤다. 영조는 치세46년(1770년) 대백과사전 격인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기 위해 학문에 능통한 학자들을 모았다. 여암도 홍봉한의 추천으로 '여지고'편찬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지고는 단군과 기자이래의 역대 국계(국계)와 군현(군현)의 연혁 등을 서술한 역사 지리서. 여암은 영조의 국상을 당한 뒤 고향 순창 남산대에 낙향해 지내다 정조5년(1781년) 향년 70세로 숨을 거두었다.

여암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훈민정음 운해'가 워낙 유명해 그를 언어학자로만 알고있으나 그는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박학다식했다. 우리나라 고대부터 역사상에 나타난 각 국가와 지역및 도시들에 관한 연혁.강역및 위치 등을 고증하고 조선시대 북방개척에 관한 기록 등을 고찰하여 우리나라의 별호를 처음으로언급한 역사지리서 '강계지', 도로의 개념.관리.이정(이정)등에 대해 서술한 '도로고', 산과 강의 줄기를 추적하고 군현별산천을 설명한 '산수고', 우리 연해의 지리를 서술하고 중국.일본과의 해로 등을 상술한 '사연고' 등 수많은 지리서도 지었다. 많은 역사서와지리서를 저술하면서 여암은 지명표기에서도 독창성을 보였다. 유재영교수(원광대)는 이와 관련, "여암은 우리 지명 표기에 한자를 여러 면에서 차용 표기한 사실을 밝히고 차용 한자와 한국식 조자(조자)를 사용해 지명표기에도 국어존중의 뜻을 담았다"고 밝혔다.

또 수레의 효용성를 밝히고 이용을 주장한 '거제책'을 비롯, 관개용 수차의 개발을 주장한 '수차도설', 우리병선의 모양.구조.속력.편제 등의결함을 지적하고 개혁방향을 제시한 '논선거비어'등은 정주학의 공소 공론에서 벗어나 실사구시를 연구방법으로 견지한 여암의 저술들이다.김재근서울대 명예교수는 "여암의 '논선거비어'는 우리 군선의 결함으로 지나치게 과도한 크기,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한 부실한 시공,속력이 나지않는 평저선(배바닥이 평평한 배)으로 제작하는점 등을 들고있다"면서"여암의 군선개혁론은 도면을 작성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해 여암이 당대의실학자중에서도 가장 오늘날의 공학에 가까운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여암은 언어.문자학과 역사.지리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선박.수레 등 과학.기술과 철학 분야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립대의 윤재풍교수는 "옛 것을 빌리되 그것을 고쳐나가는 탁고개제가 당시실학자들이 내보인 일반적 지향이었지만 여암은 특히 두드러진 학자였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연구가 본래 역학과 성리학의이론적 배경에서 시작했으나 실학적 입장에서 독창적 이론체계를 발전시켰고 '도로고' 역시 주(주)나라 제도의 연구에서 시작했으나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방법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이어 "여암은 학문의 목적을실용주의에 두었다"면서 "수레와 병선제 연구가 대표적 사례"라고 강조했다. 여암이 '거제책'에서 "사장(사장)에 능한 사람만을 뽑는 과거제로인해 초야에 특이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어도 쓰이지 못하고 있다며 인재등용에서 다른 길을 열어야한다"고 주장, 실용주의가 학문의 중요한 목적이 돼야함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암 이전에 실학의 근원을 싹틔우고 여암 이후에도 대성한 많은 실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여암은 문자학과 지리학 분야에서 독보적 업적을 남겼고과학.기술분야에서도 여러가지 새로운 경지를 탐구했다. 따라서 우리 실학사에서 여암이 빠질 경우 그 공백을 메울 수 없다고 관련 학자들은 주장한다. 〈조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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