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도계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는 김의태는 누구인가.재일교포로 1960년대 혈혈단신 조국을 찾아와 국내유도계를 평정한 한국유도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귀화를 거부하고 영원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대학교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김의태씨가 지난달 31일 24년만에 대구를 찾았다.그의 방한을 계기로 재일유도인으로서 김의태의 삶을 재조명해보고 그가진단하는 한국유도의 현주소를 들어본다.
1964년 동경올림픽 유도경기가벌어진 동경무도관. 재일교포 김의태는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중량급 준결승에서 일본유도의 자랑 오카노와 맞붙었다.
오카노는 이전에 다섯번 싸워 한번밖에 이겨보지 못한 어려운 상대지만 장단점분석은 이미 끝낸 상태. 김의태는 경기시작 3분만에 상대의 허리채기공격을 재빨리 피하며 멋진 밭다리후리기로 오카노를 매트에 꽂았다.그러나 심판판정은 한판이 아닌 장외. 김의태는 결국 판정패, 동메달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는 한국유도가 올림픽에서 딴 최초의 메달이었다.그의 올림픽입상은 일본과 유럽에 비해 한수아래로 치부하던 한국유도에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이후 한국유도가 세계를 제패하는 밑거름이 됐다.이처럼 23세의 나이로동경올림픽무대에 태극기를 건 김의태는 본적이 한국일뿐 일본에서 태어나 줄곧 일본에서 생활했다.
일본유도의 명문 천리대에서 유도를 익힌 김의태는 20세때인 1961년 세계선수권대회 3위를 차지하면서 국제무대에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김의태는 일본유도계의 끈질기고 강압적인 귀화요구를 뿌리치고 조국의 대표선수가 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그와맞붙었지만 30초를 견딘 선수가 단 한명도 없었다.
김의태의 애국심과 실력은 인정받았고 그는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안고프레올림픽, 올림픽 등에 참가해 조국의 명예를 드높였다.
이후 천리대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김의태는 수시로 조국을 찾아 대한유도연맹,대표팀 등에서 유도지도를 했다. 그의 다양한 기술과 연속공격술, 투지와불굴의 정신은 한국유도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고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유도인들 사이에서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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