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증언한다3(광복50년...전일본군 위안부 수기)-(3)대만으로

입력 1995-07-29 00:00:00

안주에서 한달넘게 머문 어느날 모두 원피스를 입고 구두도 신으라고했다.익숙지 못한 서양옷과 구두에 모두들 걸음을 제대로 못걸어 투드덕 투드덕거렸다.

분순이와 나는 상대방의 팔을 긁는 것으로 집에 돌아간다는 뜻의 암호를정해둔 적이 있는데 새옷 입으라는 말에 내가 분순이의 팔을 슬쩍 긁으니그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집에 돌아가는구나' 싶어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날 기차를 탔다. 며칠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고향 대구가 아닌 중국 대련(대련)이었다. 큰 배들과 일본군인들이 북적댔다.

이튿날 다시 배를 탔다. 함께 출발한11척중 마지막 배였는데 우리 5명외 딴 여자들은 안보였고 일본군인들이 수백명 탔다.

문득 '이제 집에 돌아가기는 틀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신(신)을 찾았다. '나는 죽더라도 부디 우리 아부지, 어무이, 동생들 잘살게 해주이소'하고 비는데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여자들은 서로 대화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을 뿐아니라 화장실갈때 이외엔하루종일쪼그려 앉아 있어야만 했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바엔 죽는 것이낫겠다싶어 죽을 생각만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배는 공습을 피해 밤에만 움직일 때가 많아졌다.

그런 어느날 확성기에서 "아가씨들, 오늘 설날이니 노래할 사람은 올라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1944년 1월1일이었다. 내가 대표로 올라가 야학때 배운 일본 노래를두어곡불렀다. 갑판에서 배밑창으로 내려오며 보니 밖은 불야성처럼 훤했다. 상해(상해)였다. 상으로 받은 크고 둥그런 찹쌀떡 2개를 5명이 나눠먹었다.전쟁말기라 폭격이 점점 심해졌다. 어느날 밤, 쾅쾅거리는 무시무시한폭음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들로 배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나는 배멀미로 속이 뒤집히는 데다 머리가 터질듯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기다시피 화장실에 가니 그 와중에도 한 군인이 앞을 가로막고 달려들었다.

물어뜯고 발버둥을 치며 안간힘을 썼지만 남자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실신했다가 깨어나보니 이미 내 몸은 피투성이가 돼있었다.그당시 분순이나 다른 여자들도 다 일본군인들에게 당했다. 그후부터 우리는 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강간당했다. 죽어도 같이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며 끈같은 것으로서로를 얽어매 화장실에도 같이가고 했지만 이미 짐승으로 변한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겁많은 나는 군인들 얼굴 쳐다보는 것조차 무서워 늘 덜덜 떨었다.한번은 이렇게 사느니 바다에 빠져죽으리라 마음먹고 갑판으로 나갔지만시퍼런 물이 집어삼킬듯 파도치는 모습에 그만 두려워져 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폭격이 심한 그날밤 앞서가던 10척의 배는 모두 침몰됐고 우리가 탄 배도앞부분이 부서졌지만 용케도 항해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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