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진압 전말-무기고 접근자 재량껏 발포 승인

입력 1995-07-19 23:19:00

5.18 광주민주화운동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해온 검찰은 지난 80년당시 광주에서 벌어진 시위 상황과 이에 대한 계엄군 진압의 전말에 대해 상세히 발표했다.〈계엄확대 이전 상황〉

▲5월 3일 전남대생 3천여명이 처음으로 시국성토 대회를 개최했고 5월9일조선대생 2천여명도 시국성토 대회를 개최했으며 5월14일 오후 2시50분께 전남대생 2천5백여명이 경찰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진출, 전남도청 앞에서 3시간여동안 처음으로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를 열었다.

한편 당일 전남도지사실에서 31사단장.경찰국장.전남대및 조선대 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원사태 대책회의를, 윤흥정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과 신우식 7공수여단장을 불러 학생 가두시위대책 합동작전회의를 열고 시위대책을 협의했다.

5월15일 새벽 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1개 대대씩 출동시켰으며 대학생 1만5천여명은교내시위를 마친 뒤 오후부터 전남도청앞에서 연합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때 학생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이 내릴 경우 다음날 오전 10시 학교 정문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뒤 정오에 도청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투쟁방침을 시달했다.

5월15일 오후 4시께 대학생 3만여명이 도청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씨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인 뒤 오후 8시께 도청앞에 재집결, 시가지 횃불 시위후 5.16 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했다.〈계엄확대와 계엄군 배치〉

▲ 5월17일 오전 10시40분 2군사령부는 광주소재 8개 전문대에 31사단 병력을 투입토록 지시하고오후4시에는 7공수여단 33.35대대를 31사단에서 작전통제토록 지시했으며 오후 7시40분 전교사에 18일 0시부로 충정작전이 유효하므로 대학점령은 18일새벽 4시, 불순분자 체포는 18일 0시이전까지 완료하라고 지시하고 오후 8시께 2군사령부 통제아래 전남대 조선대 등의 소요주모자를 전원체포하라고 시달했다.

광주지구 보안부대는 이날 오후 11시께부터 시위주동자에 대한 예비검속을실시,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등연행 대상자 22명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등 8명을 체포했다.

계엄사 진압부대 투입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은18일 새벽1시께 31대대를전남대에, 35대대를 조선대에 각각 배치했으며 31사단 소속 장교 14명과 사병1천1백32명도 전남도내 16개 대학등에 배치됐다.

5월18일 새벽1시10분께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학내 잔류학생 69명을체포하고 조선대에 배치된 35대대는 잔류학생 43명을 체포해 헌병대에 인계했다.

이날 새벽3시께 2군사령부의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지시에 따라 전교사는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던무기 4천7백17정과 탄약 1백16만발을 회수했고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승인 건의에 대해 지휘관 재량하에 실시토록 지시했다.

〈5월18일〉

▲ 전남대 및 광주시내 상황

일요일인 이날 오전 9시께 전남대 정문에서는 등교학생과 출입을 통제하는7공수여단 33대대간에 시비가 벌어진 가운데 10시께는 2백여명으로 증가한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군에 돌을 던지는등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오전 10시30분 전남대생 1천여명이 금남로에 집결, '계엄해제'를 외치며시위를 시작해 화염병 투척으로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과 충돌했다.▲7공수여단 시위진압 투입 및 11공수 여단 증원

오후들어 11공수여단, 61.62.63대대가 광주로 이동했다.

시위대의 투석으로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안까지 추격해시위대를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 도주를막는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바닥에 처박도록 하는 기합을 주기도 했다. 이날 시위대 2백73명이 체포됐다.〈5월19일〉

▲11공수여단 배치, 시위상황과 최초 발포

오전 9시30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을 요청했다.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분노한시민.학생들이 시내 요소요소에 모이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상가가 철시했다.

시위대는 금남로 네거리.충장로 1가 등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력한저항을 했고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충장로 일대 다방 및 여관, 민가를 수색하고 검거한시위대를 진압봉으로가격하거나 군화발로 차고 옷을 벗겨 연행했다.

오후 2시 윤전교사령관이 도지사.교육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지역 기관장회의를 개최, 이자리에서 기관장들은 "군의 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어느나라 군대인지 모르겠다"며 연행자 전원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오후 1시30분께 시위대 4천~5천여명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저지선으로 굴리고 공중전화부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돌을 던지는 등 치열한 공방전을펼쳤다.

오후 5시 11공수 63대대 일부가 광주고 부근 동원예식장 건너편에서 시위대에 포위됐을 때 시위대 몇명이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뚜껑을 열고 장갑차속으로 던져넣으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M16 소총으로 위협사격해 김영찬(19)이 대퇴부 총상을 입었다.

이날 시위로 김안부(36)가 사망했고 군경 24명과 학생 시민 수십명이 부상했으며 부상자중 4명이 자상(자상)을 입었다.

〈5월 20일〉

▲오전-3공수여단 추가투입및 계엄군 배치 상황

오전 7시 3공수 여단이 추가로 광주에도착했다. 광주시내 중고등학교가임시휴교했고 상가는 절반가량 철시했다.

오전 10시 대인시장 주변에 1천여명의 학생, 시민들이 금남로 방면으로 진출하려다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에 밀려 흩어졌다.

낮 12시 정호용특전사령관이 광주로 와서 17공수여단 지휘부에 들러 여단장등을 격려했고 윤전교사령관을 만난뒤 오후에 귀경했다.

▲차량시위및 공수여단 시위진압 상황

오후 3시50분금남로 2, 3가에 5천여명, 금남로 3가에 3천여명이 운집해군, 경과 공방을 계속했고 오후4시 3만명으로 늘어난 전남도청 인근시위대는드럼통과 화분대등을 굴리면서 군, 경의 저지선으로 접근했다.오후 6시 무등경기장에 택시 1백여대가 집결,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고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운뒤 오후 7시 전남도청앞 관광호텔까지 진출했다.

오후 8시30분 시위대 5백여명은 광주상황이 뉴스시간에 보도되지 않자 방송국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9시까지 화염에 휩싸였다.

밤 12시께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지급을 요청했고 11공수여단 61대대장등은62대대장 지프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대대장 명령에 따라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밤 10시30분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대대장들의 실탄지급등 지원요청에 대해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이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주라고 지시, 본부대 병력 20여명으로 지원조를편성, 각 대대에 경계용 실탄 1백여발을 전달했다.

이날밤 광주역 일대 시위진압 과정에서 김재화(25)등 4명이 총상을 입고사망했으며 6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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