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체육의 맥:육상(15)-10종경기등 필드도 정상금 실력

입력 1995-07-18 00:00:00

제3회 동경아시안게임 육상부문에서 한국이 거둔 성적은 금2 은1 동2.한국은 이창훈이 처음으로 열린 마라톤을 제패, 한국육상의 가능성을 증명했고 멀리뛰기에서 서영주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일본과 인도의 힘겨루기를 뚫고 부상을 시작했다.3회대회때 한국팀의 가장 아쉬웠던 종목은 1,600m계주.

엄팔룡 이이재 이동헌 손경수 등 1,600m주자는 모두 최강을 자랑하던 대구대출신의 경북선수들로 구성돼 3위 입상은 충분한 전력이었다는게 당시의 예상.

이경철씨는 "이때가 향토육상의 최전성기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모든 부문에서 걸출한 스타들이 배출돼 한국육상의 주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동경아시안게임 계주부문선수구성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수있지요"라고 회고했다.

1명이 4백m씩 달리는 1,600m계주에서 한국은 초반스타트가 좋았고 그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해 3위로 골인했다.

일본과 인도가 육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당시로는 더없이 소중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한국팀에게 청천벽력같은 실격판정이 내려졌다.두번째 주자 손경수가 세번째 주자 엄팔룡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순간 엄팔룡이 터치라인을 살짝 넘었다는 것.

한국팀의 항의도 무산돼 결국 등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때 4명의 주자들이 세운 3분18초8의 기록은 이후 10여년동안 깨지지 않았다. 한편 트랙경기 외에 필드경기에서도 향토육상의 강세는 해방전과 다름없이 여전했다.박만태씨는 "트랙경기의 발전과 더불어 필드경기도 성장을 거듭했습니다.특히 도약, 10종경기 등의 종목은 트랙경기를 통해 스피드를 키운 선수들이합류하면서 금새 전국정상수준에 이르렀지요"라고 설명했다. 단거리 강자 이이재는 멀리뛰기에서도 재능이 뛰어나 34, 35회 전국체전 멀리뛰기부문 2연패를 달성하는 등 적수를 찾기 힘들었다.

또 세단뛰기에서는 김정인 권영수 등이 국내무대를 석권하며 향토육상의자존심을 지켰다.

특히 권영수는 43회 전국체전에서 멀리뛰기와 세단뛰기 2종목에서 우승, 2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필드종목에 장대높이뛰기가 새로이 등장,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선수들 사이에서도 호기심을끌었는데 처음으로 전국무대를 석권한 선수는 다름아닌 향토출신 김덕호였다.

김덕호는 장대높이뛰기가 전국체전종목에 처음으로 채택된 1952년 33회 전국체전에서 3m10cm로 우승, 관중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이후 점차적인 기록향상과 함께 34회와 35회 전국체전을 휩쓸며 대회3연패를 기록한 김덕호는 경남의 이성의에게 자리를 내줄때까지 이부문의 독보적존재로 활약했다.

투척에서는 송희원 이달식 권대진 등이 전국무대의 패자로 떠올랐다.송희원은 36회 전국체전 투포환에서 11m55cm를 던져 우승을 차지했고 그뒤를 이달식이 이었다.

이달식은 37회 전국체전에서 송희원보다 30cm가 먼 11m85cm를 던져 투포환종목 패권을 넘겨받았다.

또 투원반에서는 대구지역 선수들과 안동출신 권대진 등이 각축을 벌이며전국무대 정상권에 진입했다.

10종경기는 6·25가 끝난후 백룡기선생이 대구에 내려와 경북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틀이 잡혀나갔다.

경북대 10종경기는 1959년 40회 전국체전에서 김경용이 3천6백70점으로 우승을 차지한 뒤41회 전국체전에서는 권대석이 다시 우승하면서 전국무대를제패했다.

장애물 경기에서는 대륜출신의 이복식이 전국무대를 휩쓸었다. 이복식은1958년 39회 전국체전 3천m장애물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 41회 전국체전까지 3천m장애물경기 3연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이후 이복식은 이종목한국신기록을 계속 갱신하며 기록을 향상시켜 최고의 장애물경기주자로 군림했다.

그가 41회 대회에서 수립한 9분34초4의 한국신기록은 이후 10여년동안 깨지지 않았다.

이처럼 향토육상은 트랙과 필드 각 종목에서 위세를 떨치지만 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차츰 퇴조의 기미를 보이게 된다.

50년대초 붐을 이루던 학교육상부는 구기종목에 대한 일반의 관심고조에따라 점차 명맥을 잃으며 구기종목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여기에는 각종 육상대회가 운영면에서 허술함을 보여 승부욕에 불타던 선수나 학교관계자들의 판정시비와 불복사태 등이 잇따르는 등 시민들로부터인기를 잃어간 탓도 크게 작용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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