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매일여성생활수기 입선작-최윤희

입력 1995-07-08 00:00:00

나는 부모님과 쌍둥이 오빠들, 언니, 이렇게 여섯가족의 막내로 온갖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왔다. 부모님이하시는 일들이나 언니, 오빠들 모두 별 근심걱정할 것 없는 중산층 가정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러던 내게 시련이 닥친 것은 열살때인 1980년 가을, 어느날이었다. 지금도 그날,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놀던 기억이 잊혀지지않는다. 하교후집에 돌아왔다가 학원을 가려는데 갑자기 다리가 붓기 시작했다. 오후에 너무 오래 뛰어논 탓이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저녁때부터 부기는 더욱 심해졌고 붉은 반점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심한 복통이동반됐다.이튿날 엄마와 피부과의원에 갔다. "고쳐보자" 하시던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일주일이 지나자 종합병원에 입원시켜야겠다는 말씀으로 바뀌었다. 경북대병원 소아과를 찾아갔다. 의사선생님은 "이 병은 피부병이 아니며 합병증을 조심해야하니 입원하라"고 하셨다. 철없던 나는 입원하면 먹을 것이 많아서 좋을거라며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다.

그렇게 입원해서 치료받은지 한달쯤 됐을무렵 복통과 반점이 다 사라져 완치된줄 알았는데 이번에 는 신장이 나빠졌다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그러나심각한건 아니니 퇴원했다가 외래진료 받으러 오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외래진료실에 갔던 엄마와 나는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매주 목요일은 소아신장환자들이 오는 날이었는데 보호자들사이엔 '고양이삶은 물이 좋다'느니 '어느 한약이 좋다', '어느 한의원이 용하다'는 등의말들과 누구는 5년째 앓고 있고 누구는 10년째 앓고 있다는 등의 소리를 자주 했다. 그 말들에 겁이 난 엄마가 의사선생님께 물어보면 "윤희는 발병원인도 알고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으니 제말대로만 하시면 됩니다"하고 희망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로부터 4년후, 중학 1학년이됐을때는 약을 먹을 필요도 없게됐고 통원치료도 1년에 두번만 가도될만큼 호전됐다. 의사선생님 덕분이기도 했지만남몰래 눈물흘리시며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아주신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덕분이었다.

그러던 그해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 입시생이 된 오빠들의 보약을 지으러 단골한의원에 가셨던 엄마의 손에는 나를 위한 한약 한봉지가 더 들려있었다. 그 약 한봉지가 순식간에 내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이야.약을 먹은지 1분도 안돼 다 토해낸 나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시작해 마침내 입원까지 하게됐다. 신장이 급격히 나빠졌다. 당시엔 이식수술을 하면성공률 50%라고했는데 어쩌면 그건 아주 정확한 확률이었다. 수술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 그때나의 상태는 최악의 경우 이식수술도 고려했을정도로 위험했었다고한다.

그러나 막상 나자신은 그렇게 심각한 줄을 몰랐다. 식구들이 모두 내앞에서는 항상 '별것아니다'며 웃기만 했기 때문에….

2주일 1회 통원치료, 한끼 10알이 넘는 약 하루 3차례 복용 등의 지시를받고 퇴원한 나는 학년이 바뀐지 한달이 지나서야 학교에 나갈 수가 있었다. 덕분에 전학온 학생마냥 외톨이가 됐고, 입원경력을 들려주며 나와 장난치지 말라는 담임선생님의 자상한 도움(?) 덕분에 더욱 나는 반친구들로부터 소외됐다. 점심시간때만 되면 많은 약을 먹는 내 모습에 아이들이 피하는것을 느낀 나는 슬금슬금 약을 빼먹기 시작했다. 공부도 제쳐두고 친구사귀기에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내건강과 성적은 날이 갈수록 내리막을 달렸지만 늘어나는 친구들의 숫자에 온 신경을 쏟느라 아랑곳하지 않았다.중3이 됐을때 성적을 올리기 위해 매일 밤늦게까지 도서실에서 지내는 생활을 했지만 나빠지기 시작한 건강은 성적까지 못올라가게 꽉 잡고선 더욱내리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1986년 봄, 화창한 날씨속에 온갖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따스함이 넘쳐나던 그때 나는 '만성신부전증'이라는 평생 뗄 수 없는 꼬리표를 달고 혈액투석을 시작했다. 이 병이 무엇인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뭐가 뭔지를 몰랐지만 결코 내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적 없던 어머니께서 "윤희야, 윤희야"하시며 마구 우시는 모습을 보고서야 사태가 심각해졌음을 깨닫게 됐다.그때까지 6년을 신장병으로 살아왔지만 특별히 저염식 등 식이요법을 안해도 됐고 행동의 제한이나 별다른 고통도 없어 그동안 병의 심각함을 모르고살았었다. 물론병이 있다는 사실때문에 어딜가나 특별대접만 받았고 특히가족들은 청소 한번 안시킬 정도로 나를 끔찍히 위해주면서 병으로 인해 위축되거나 실망을 가지게할 틈을 준 적이 없어 내병에 대해 나자신 모르는것이 너무 많았었다.

'만성신부전증'. 신장이식이 아니고는 영원히 기계에 목숨을 의존해야만살 수 있는 병. 이런 처지가 됐는데도 웬일인지 두려움이 없었다. 무식이 용감이라는 말처럼 웃기만했으니 오히려 축복이라고나 할까.

그당시 나는 애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애와 같은 병실을 사용했는데 그애는 자기 엄마의 신장을 이식받은 상태였다. 하루는 건강하신 엄마가 여러가지 검사를 하시길래 왜 그러시느냐고 물으니 대뜸 애라가 "언니는 그것도몰라? 언니는 이식수술 안 받으면 평생 투석기에 매달려 살아야하기때문에언니엄마가 신장을 떼어주시려고 그러시잖아"하는 것이었다.그제서야 내가 이식수술 받기위해 대기중인 것을 알게됐다. 8월20일로 수술날짜를 잡아놓고 각종검사를 했다. 수술날, 입원실을 나서며 엄마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그 어떤 말로도 죄송하고 두렵고 고마운 내마음을 표현할 길 없어 그저 엄마뺨에 뽀뽀하는 걸로 대신했다.

이제는 어떠한 일을 해도 효녀라는 소리와는 상관없는 순간이 돼버린 7시간의 수술이 끝난후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몹시 지친 표정의 아버지께서 링거에 약을 넣으며 간호하셨는데 내가 눈을 뜬후 제일 먼저 한 말이 "엄마는?" 이었다고 들려주셨다. 두사람 모두 수술이 잘됐다는 말씀에 안도감과함께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른 병실에 홀로 누워 고통스러워하고 계실 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자꾸나오려고했다. 그당시 아버지께선 미군부대에 다니시면서 우리 학비를 위해부업으로 작은 삼촌과 함께 당구장을 개업하셨는데 개업 1년정도 돼 어느정도 안정될 참에 이 못난 막내때문에 당구장을 팔고도 빚을 지게됐다. 그러나어느누구도 내앞에서 돈얘기를 하지 않았고 내가 언짢아할만한 것은 모두 숨겼기때문에 스무살이 넘어서야 우리집에 빚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수술후 일주일만에 소변이 나오지 않아 가족들을 애태우게도 했고 칼륨수치가 높아 응급치료도 하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넘기고 한달이 지나 퇴원을 했다. 어느정도 건강을 되찾게돼 기뻤지만 병원생활 석달동안에 나는 귀가 들리지 않게 됐다. 혈압상승에 따른 약물과다복용이 원인이라는데 보청기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계속해야 했기에 복학해서 어렵사리 적응하고 있는차에 이번엔 이식거부반응이 왔다. '산다는게 왜이리 힘들고 어려울까? 이렇게 살려고 빚지고 엄마의 생살까지 쨌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기만 했다. 만성신부전증환자들의 가장 큰 희망이요 치유법인 이식도 내게는 소용없고 평생기계에 의존해야만하는 처지가 됐다.

다시 시작한 혈액투석. 팔에 혈관수술을 한후 이불꿰매는 바늘보다 두배나굵은 주사바늘 두개를 꽂고 기계에 연결시켜서 5시간동안 피를 걸러줘야한다. 만성신부전증 환자들은 소변이 전혀 나오지않거나 나오더라도 극히 양이적고 나쁜 찌꺼기는 빠지지 않기 때문에 먹는 모든 음식이 전부 체중으로 붇고 피속에 요독이 쌓여 그냥 두면 죽을 수 밖에 없으므로 정지된 콩팥의 기능을 투석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번 투석을 했기때문에 식이요법 또한 엄하고 까다로웠다.하루 수분은 물, 국, 아이스크림, 과일 등 모든 종류를 다 합쳐 한컵뿐이며,과일이나 야채는 반드시 삶아서 소량만 먹을 수 있었다. 칼륨수치가 높으면심장마비 위험이 있다고 날것으로는 바나나 한개 토마토나 오이 한개도 먹을수가 없었다. 어육류 역시 염분이나 단백질을 계산하며 먹어야만 했으므로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참는 것도 힘든데 양마저 마음껏 먹을 수 없으니 얼마나힘들고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물을 마음껏 못 마시는 것이었다. 지금도 혈액투석때문에 하루 한컵정도의 물만 허용되고 있다.까다로운 식이요법때문에 몸은 야위어져만 가는데 혈액투석까지 나를 애먹였다. 너무나도 거부반응이 심해서 투석 5시간내내 혈압상승으로 인해 토해냈고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에 시달려야했다.

투석이 끝나면 거의 탈진상태가 돼 끌리다시피 택시에 실려 집에 오면 무릎을 꿇고 머리는 베개에 박은후 엉덩이는 높이 든 그런 자세로 두통을 참다가 저녁밥도 잊은채 그대로 잠이 들곤했다. 두통은 다음날 오후까지 계속됐기 때문에 책이나 TV를 볼 엄두도 못내고 고통을 참느라 낑낑댈 뿐이었다.투석후 3일째 되는 날엔 좀 괜찮아져서 책도 보고 가벼운 외출도 하지만 다음날은 또 병원에 가야하고 그러면 또 탈진해서 오고... 다람쥐 쳇바퀴같은생활이 계속됐다.

사춘기의 나이에 또래 아이들이 정답게 학교가는 그 시간에 퉁퉁 부은 얼굴로 병원에 가는 내 자신을 생각할때마다 살 이유를 알 수 없고 죽고싶은마음만 들었다. 한편으론 가족의정성과 지금까지 내게 들인 돈을 생각해서라도 목숨이 붙어있는한 끝까지 해봐야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살려면 나역시 가족과 주위사람들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아프더라도 밝은 생각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어진 환경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후 일주일에 이틀 머리가 덜아파 눈을 뜨고 다닐 수 있는 그날들을 집에 있지 않고 지점토를 배우러 다녔다. 기초만 배웠지만 그 솜씨로 선물을해도 모두 좋아해 기분이 참 좋았다. 솔직히 내힘으로 돈도 벌어보고 싶었다. 치료비로 한달에 60만원이 넘게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철이 들면서 조금이라도 부모님을 돕고 싶었지만 건강한 사람들도 구하기 힘든 일자리를 귀먹고 몸까지 아픈 내가 얻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실이 되고말 것이다. 3일살기위해 하루를 병원에서 지내야하는 것이 내 삶인것을….그런데 날이 갈수록 부작용이 심해졌다. 보다못한 의사선생님과 부모님은복막투석을 권하셨다. 수술로 배에 가느다란 호스를 꽂아놓고 하루 4차례 약을 넣어서 요독을 걸러주는 투석방법인데 병원에자주 안가도 되고 집에서하는 투석이지만 평생 배에 호스를 꽂아야하는 것과 물에 몸을 담글 수 없고하루 4회 약을 갈아줘야하기 때문에 여행이나 외출에 제약이 많아서 나는 죽어도 싫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러나 살고싶은게 인간의 본능인지 정말 죽을 정도가 되니 살려달라고 복막투석을 했다. 부작용으로 인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목구멍, 가슴속에도 물집이 생겨 피를 토하는 가운데 배에 호스를 꽂았다. 생각과는 달리 복막투석은 내몸에 잘 받았고, 무엇보다도 매일 요독을 걸러주기때문에 식이요법이편했다. 해골같이 말라만가던 혈액투석과는 달리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특히 그렇게도 맘껏 마시고 싶던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다는 것이 꿈만같아서 물 한컵을 마시고는 생시인가 싶어 허벅지를 살며서 꼬집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복막염이 찾아오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내손에 칼만 쥐어주면 지금 당장 죽을게요"라고 막말까지했을까. 다행히 약을 넣고 치료하면 일주일정도만에 나았기때문에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후로도 복막염으로 여러번 고생을 했다. 또한 4회 넣어주는 약이 포도당으로 돼있어 배고픔을 못느낀 나머지 음식을 잘먹지 않을 때가 많아 여름에 탈수증과 빈혈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건강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던중 못다한 공부를 하고싶어 대구대 부설 농아학교인 영화학교를 찾아갔다. 농아학생들 앞에서 나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만이라도 자유롭게 하는 내모습을 그렇게 부러워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보다 옆학교의 시각장애학생들이나 지체장애학생들이 더 불쌍하다고 했다.

그동안 내주위에는 아픈 사람도 없고 장애인도 없어서 나는 내가 제일 불쌍하고 불행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 교만이 깨지고 주위를 다시 보니말이라도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내 발로 걸어갈 수 있고, 소량이라도 먹고싶은 것 내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았다. 그뿐인가, 그렇게 많은 치료비를 쓰고도 계속 치료받을 수 있는 작으나마 여유가 있고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이제는 모든 것을 겸손하게 볼 줄알게 됐고 무엇에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영화학교에 다닌지 두달만에 배에 꽂은 호스가 비뚤어져 재수술을 하느라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요양을 했다. 다시 건강해졌을때 또 무엇인가 하고싶은 생각에 칼라믹스라는 공예를 배우러 다녔다. 그즈음 우리가 살던 집을헐고 새로 짓는다고 임시로 이사를 했는데 집이 몹시 낡고 주위환경이 불결했다. 게다가 공예를 배우느라피곤까지 겹쳐 복막염이 아주 심하게 찾아왔다. 두달만에 10㎏이나 체중이 빠진 나는 결국 복막투석 4년만에 호스를제거하고 다시 그 끔찍한 혈액투석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혈액투석은 그사이 기계가 많이 좋아져 투석시간이 4시간으로줄었지만 가끔씩 혈압이너무 낮아져 식염수도 넣어줘야하고 근육경련이 일어나기 때문에 쉴새없이 주물러 줘야한다. 다시 엄격해진 식이요법이 너무힘들어 절제하지 못하고 마신 물때문에 지난 여름엔 응급으로 투석도 해야했고 칼륨이 높아져 가슴의 압박과 손발의 저림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지난봄에는 혈관이 막혀서 오른팔에 재수술을 했다.

이제는 수술실도 무섭지 않은 여유가 생겨 의사선생님께 흉터없이 예쁘게꿰매달라고 부탁도 하고 수고하셨다고 인사도 드린다. 요즘도 나는 일주일에두번 투석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직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내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이렇게 살아야한다. 그러나 두렵진 않다. 비록 아픔이 내생활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내삶 전체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인생에는 건강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앞으로도 기약없이 걸어가야하지만 나는 그것을 마다하지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함께 지켜보며 가야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죄송하고 미안하다. 지금까지 쓴 치료비를 10만원권 수표로 쌓으면 내키보다도 높을거라시며 농담도 하시지만 그저 내가 오래만 살아주길 바라시는부모님. 언젠가 학교다닐때 심청전얘기가 나와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위해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요?"하고 물으신 적이 있다. 모두들 "예"하고 대답했지만 "부모님을 위해 눈을 빼드릴 수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을때 아무도 손들지 않았던 그 아이들 속에 나도 있었다. 지금 다시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한손 아니라 두손도 다 들리라.

스물네해를 살아오며 건강 한가지를 잃어버린 대신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깨달았다. 무엇보다 가족들의 사랑을 알 수 있었고 마음가짐의 소중함과 정신이 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내가 아픈뒤 알게된 사람들은내 아픔으로 인해 나를떠나는 일이 없이 오히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축복도 받았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바라보며 생각하게 됐고 감사드릴 줄 아는마음이 생긴 것은 내 인생에서 바꿀 수 없을만큼 귀한 것들이다.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있을 삶을 사랑하며후회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동정하지만 나는 그것이 싫다. 처음만나서얘기할때 귀가 안들린다고 하면 눈빛이 달라지고 몸도 아프다고 하면 말까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아프다는 이유 하나로 동정받아야할만큼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그런 일들은 나를 더 힘들게 하고 기분이 좋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항상 무슨일이든 하고싶다. 비록 건강때문에 중간에 그만 두는 일이 있더라도 처음부터 '할 수 없을거야'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고 여건이 될때는 꼭 뭐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아픈 사람이 무얼하느냐"고 핀잔을 줄때는 정말 기운이 빠지고 우울해진다.

요즘은 그동안 사람사귀는 일을 소홀히 한 것과 혼자 여행해보지 못한 일들이 무척 안타깝게 여겨진다. 스물다섯살이 돼서야 생전 처음 혼자 여행을해보았다. 당일여행이건만 기차의 종류를 구분못해 무궁화호 표를 끊고도 새마을호를 타는 실수를 하게된 뒤로는 기차구분도 할 줄 알게됐다.작년부터 나가기 시작한 교회의 청년부에서 활동하면서 내또래 젊은이들의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중이다. 왠지 그들과 내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고 내가 너무 꽉 막힌 듯 살아가고 생각하는 것 같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사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을 사귀어도 나는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을 잊지않는다. 언젠가는 부모형제들과도 떨어져야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내 인생에 충고는 해줄 수 있지만 내 짐을 나누어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든 나는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긴다. '당신이 허무하게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죽은 그가 그렇게도 살고 싶어했던내일이었다'라는 말이 내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으므로 내가 살아있다는것자체만으로도 감사하며 불평없이 살려고 노력한다.

요즘 나는 가끔씩 그림을 배우러 다니며 며칠뒤부터는 공예를 배우려고 한다. 손으로 하는 일에 취미가 많아서 손을 가만히 놀리고 싶지 않다. 올가을엔 친구에게서 컴퓨터를 배우기로 했다. 매주 교회청년부 주보 만드는 일에도 참여하고 시간나는대로 집안일도 거든다. 힘이 들어 서서 설거지를 하진못하지만 의자를 싱크대 앞에 놓고 앉아서라도 하고 가끔은 양말정도의 작은빨래도 한다.

무엇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생각하는 나는 나처럼 아픈 사람들과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밝게 바꾸고환경을 받아들여 내것으로 만드는지혜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건강한 사람들에겐 값싼 동정을 헤프게쓰지말고 진정한 사랑을 베풀어주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7월부터는 주3회 투석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약없이 아플것같지만꼭 하고 싶은 말 한가지가 있다. "나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대로의내 삶을 사랑하며, 정말 정말 행복하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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