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19-순암안정복중-주체 정통론 따른 역사의식 설파

입력 1995-07-06 00:00:00

역사는 서술이다. '십인십의'라는 말처럼 사람에 따라서 역사 해석은 달라진다. 역사가 지니는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과거의 인물 또는 사건을 통해서 현세와 후세의 교훈을 얻는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안정복(1712~1791)은 과거의 사실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도덕과 윤리를 통해서 인식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감이며, 역사서는 후대 독자들에게교훈을 주려는 '도덕적 의도'를 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 고증하고, 역사적 인물의 잘잘못을 따졌던 안정복은 왕위찬탈자들의 행위를 신하로서의 본분을 잃었으며 계통을 침범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실제 위만조선을 위해 항쟁한 성기를 충신으로, 신라를 배반하고 고려를섬긴 최언위를 폄하하였으며, 의종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조위총을 높이는등 기존의 사서와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충절관념을 염두에두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주자 강목의 틀을 빌려 조선후기 역사학의 한 정점을 이룬 '동사강목'을지은 안정복은 종래의 역사서가 왕실사나 정치사에 치우쳤던 점을 반성, 이웃나라의 풍습, 부락의 성쇠, 산천의 원근, 천재지변등 경제 사회 문화사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안정복은 상편에서 살펴보았던'잃어버린 고토 회복' 주장 못지않게 주체적 사관과 정통론을 따진 역사학자이다.

한때 박정희대통령이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부르짖었었지만 안정복은 이미 2백여년전에 사대사상에 강하게 도전하였다. 그는 스승 이익이 주장한 '중국이란 대지중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설에 찬동하면서 대륙의 여러 민족, 즉 한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등에 의해서 건립된 국가를 우리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보았고 그들에게 특수한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하늘이 어찌 지역을 가지고 인간을 구별하겠는가'(순암집 중)안정복의 '탈사대사상'은 외교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대외관계에서 실속없이 대의명분에 구애되지 말고 국제정세를 신속 정확하게 파악, 대응책과 살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려때 몽고적이 내침하여 임금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어찌하여 적을 함부로 깊이 들어오게 만들어놓고 탄환처럼 조그마한 섬에서 사수할 작정을 했는가. 나라전체가 적지가 되고도 섬 하나로 연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라면서 국력이 약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강적을 상대로 대책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그보다는 몽고와의 평화협약에 의하여 우리나라가 피해를 적게 당하도록노력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명분에 집착, 화를 도발한 것은 정치담당자들의실책이라는 견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때 우리나라 정책 당국자들이 국민들의 감정 흐름에만편승, 앞은 내다보지 않고 쌀시장을 수호한다면서 통신 교육시장등 고부가가치 시장을 한꺼번에 내준 우둔함 역시 칼없는 무역전쟁시대의 실책이지 않을까. 삭발까지하면서 무턱대고 쌀시장 개방 절대불가를 외치기보다 일본처럼일찌감치 국경없는 무역전쟁시대를 예견, 쌀맛을 개선하고 벼의 품종을 다양화하여 제 아무리 캘리포니아산 쌀이 밀려와도 우리 밥상을 신토불이 농산물로 지킬수 있도록 기술개발을 유도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할까.안정복의 주체적 역사관은 '동사강목'에 잘 나타나 있는데 중국에 대한 종주국의 개념을 타파하고 모든 국가를 대등한 위치에서 인식하여 자국의 이해관계와 역량을 파악하여 무리없이 대처해야한다고 압축할 수 있다.대다수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대륙의 한 귀퉁이에 붙어있어 지정학적으로불리하고 반도인 기질 탓에 약소국이 될수밖에 없다고 보았으나 안정복은우리나라의 역사, 지리적 위치, 민족성에서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역설했다.

고구려가 말갈을 복속시켰고 수나라가 백만의 군사로도 고구려군을 이기지못하였으며, 당나라가 요동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고구려만은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했지 않았던가. 백제는 서해쪽에 붙은 작은 나라였지만 당과 신라가 여러해동안 공격하여 겨우 평정하였고, 신라는 영남의 한쪽에 치우쳐있으면서도 고구려 백제와 맞서 싸웠고 바다건너 일본을 정벌한 사례를 들어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성이 약소국가로 전락하는 이유가 될수 없다고 보았다.우리 민족의 체질 역시 약하지 않다고 전대 사가들의 말을 인용, 강변했다.

조선중기 문신인 강항(1567~1618)은 씨름대회를 열면 감히 일본인이 조선사람을대적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고, 역시 조선시대 문신인 최부(1454~1504)도 우리나라사람 한명이 중국인 열명 백명을 당한다면서 결코약하지 않다고 하였다.

안정복은 우리나라가 약소국이된 이유를 사대사상에 기인한 문약의 폐단과 국내의 정치적 불안을 꼽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당의 문화를 존숭하여 문만을 숭상, 무력이 점차 쇠퇴하였고, 고려 광종이후 과거법이 시행되어 엘리트들이 모두 시문에 몰두하여 적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도 속수무책인 지경에 처하게 된원인이 모두 제도적 모순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를 행하기 전에도 호걸이 있었으며 문장 재사도 있었다. '일찍이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아 쓴적이 있는가. 과거제로 인해 학자가 허문만을 습득하니 인재를 잃어버리고 좋은 풍속이 허물어지는데도 제도를 고칠줄 모른다'면서 우리나라가 문약해진 이유를 모화사상과 과거법의 부작용에서 찾았다.또 고려중엽이후 권신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휘둘러 국내의 정세가 적에게알려지는 정치적 불안이나라의 기둥을 흔들어버린 다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안정복은 안으로는 중국문화의 숭배를 배제하고 탄탄한 국방력(무력)의 바탕위에 왕도정치를 행함으로써 국내의 정치적 불안을 제거하며, 밖으로는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하여 소위 '존화양이'라는 헛된 대의명분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나라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국제적 추세를 판단하고 대처해 나아간다면 우리나라는 충분히 강국으로 발전할 역량을 지녔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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