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동구 안심종합사회복지관은 7월10일까지 이웃사랑실천사업인 '작은미소 나누기'운동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차량 급식서비스)및 후원자를 모집한다. 봉사시간은 주 1회 3시간. 신청및 문의 962-4137.##:14중국 길림성.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 하나 보이지않는 대평원. 서쪽으로는몽고 고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동으로는 동부 만주의 산림지대로 나아가는만주의 한복판.한때 만주벌판의 주인공은 한민족. 고구려가 이땅에 북부여성주를 설치하고 30여개의 성을 쌓아 대륙의 세찬 바람을 눌렀고 발해가 부여부를 두어동서를 제압했지만 지금은 중국인들의 삶의 터전으로 변해버린 강토이다.잃어버린 만주벌판을 회복해야한다는 염원은 한민족의 이룰 수 없는 희망사항이 돼버렸지만 조선조가 낳은 역사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은 그곳을 회복해야 국력이 세어진다는 견해를 '동사강목' 부록편인 '지리고'에서역설했다.
안정복은 숙종조 말에 태어나 정조 중반기를 살다 간 실학자로서 학문사상적으로 근기남인(영남남인과는 달리 서울경기지역 농촌에 살던 남인)의맥을 이었다. 일찍이 유가적 관념을 넘어 박학다식을 추구했으나 '성리대전'에 접하면서부터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후에 스승으로 사사한 이익에게보낸 편지에서 '젊은 시절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였으나 끝내 얻는 바가 없었다'면서 그동안의 학문적 모색에서 한계를 느끼고 이를 성리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학문의 방향을 성리학 중심으로 바꾼 후 35세에 비로소 이익의 문하생이되었는데 서학에 경도된 좌파와는 달리 경학과 역사학에 치중하는 보수 우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38세에 경학이 뛰어나다하여 교관에 추천, 5년간 녹을 받았던 그는 이후고향에 돌아와 61세에 이르기까지 '동사강목'으로 대표되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완성시켜나갔다. '정통사관'과 '고증적 학문태도'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충족시킨 대작 '동사강목'은 조선후기 역사학의 발전선상에서 하나의 정점이며 뒷날 개화기의 교과서류는 물론이고 한말 일제시대 역사가 내지민족사학자(박은식 장지연 신채호등)들의 학문적 사상적 계도서가 되었다.
61~73세의 노년기에는 세손(뒷날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고 목천현감을 역임, 자신의 경륜을 폈으며 73세에서 80세로 타계하기까지 저술과 후진양성으로 말년을 보내는 한편,근기남인 소장파들이 천주학에 경도되는 현실에 대해 '천학문답'(천학문답)등을 저술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주자성리학을 옹호하였다.
80평생 입신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은 현실을 위해서만 있고 지식은 실용을 위해서만 의의가 있다'는 '경세치용'의 입장을 늦추지 않았던안정복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왕성, 고대부터 고려말까지의 통사체계를 서술한 '동사강목'을 비롯하여 '열조통기' 이익과의 역사문답을 적어놓은 '동사문답'등을 남겼고 문집 '순암집'도 남아 있다.
편년체 한국통사인 '동사강목'은 본편 17권, 부록 4편(고이 괴설변 잡설지리고) 3권등 모두 20권으로 43세(1758년)에 일단 탈고했다. 달필이 아닌안정복 특유의 고졸체로또박또박 쓰여졌는데 20년이 훨씬 지난후 목천현감시절 초고를 다시 손질하고 서문을 붙여서 마무리했다.
'동사강목'은 주자의 '자치통감'체제를 모방, 체제면에서 독창성이 없으나우리 역사의 정통사관을 종합, 재정립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안정복은 스승 이익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가는 반드시 강역을 먼저 정해야한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사서들이 신라땅을 제외한 다른 나라, 특히 고구려땅에 대해서 탈락과 오류가많다고 지적, 동사강목에 앞서 '지리고'를 저술했다.
국가의 강역이나 강 산의 위치를 고증한 43개 항목이 들어있는 '지리고'에는 한강이북지역 특히 요동지역에 큰 관심과 함께 잃어버린 땅에 대한 강한애착이 담겨있다.
여기서 안정복은 단군조선의 강역을 기자조선의 강역과 같았으리라보고 요동지역에 비정하였고(단군강역고), 고구려도 요동지방에서 발흥했으리라 이해하였으며 예맥의 초기강역도 요동지방으로 추정했다.
그가 요동지방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은 이 지방이 단군이래 우리나라의강역이었고, 전략적인 요충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리고' 요동군고에서는 요동회복의 기회가 세차례나 있었지만 이를 이루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요동이 발해에 속했을 때국력이 미약하여 회복하지 못하였고, 고려 건국초 왕건이 이 지역의 회복을도모하였으나 갑자기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고려말 이성계가 동녕부를 수복한 뒤막강한 군사력으로 요동회복이 가능하였지만 국내문제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는 요동지방이 고구려가 망한 이후 당 발해 요 금원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복속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서강대 사학과 강세구씨는 "안정복이 당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기 시작한 탈중국적인 의식, 국사연구의 활성화, 지리연구를 통한 이해사조등을 통해 실지회복의식을 다져나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이밖에도 그는 주요한지명의 경선과 위선도 표시한 조선지도를 작성했는데 한성부의 위선(북위 37도, 경위 1백63도 1백50리)은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만큼 정확하게 이해했다.
경위선을 사용한 조선지도를 그려놓고보니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위기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낀 그는 고구려 땅이었던 요동지방과 심양을 얻느냐 잃느냐에 따라서 국력이 좌우된다고 보아 실지회복의식을 더욱 굳혔으리라 추정된다. 이밖에도 그는 숙종 38년에 세운 백두산경계비가 국경문제로논란이 많자 현재의 두만강은 한중국경선이 될 수없고 그 북쪽에 있는 '분계강'이 국경이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사가는 먼저 강역부터 정해야한다고 역설했던 안정복의 '지리고'는 철저한고증을 통해 종래의 잘못된 지리기록의 답습을 탈피했다는 의의를 남겼다.〈최미화기자〉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