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학력:화원국민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 국민대법학과, 서울대행정대학원.
▲경력:제5회 행정고시합격(67) 경제기획원 예산국 기업예산과장(76),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77) 국방부 예산편성국장(78) 국보위 운영분과위원(80)12대 전국구국회의원(85) 경제기획원차관(85)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88)13대국회의원(90) 계명대 초빙교수(94)
▲상:보국훈장 천수장(80) 청조근정훈장(90)
▲저서:보리밥과 나라경제(87) 경제개혁이 나라를 살린다(92) 함께하는경제(95)
▲가족관계:부인 정송자(57) 딸 지영(29) 지경(27) 지원(24)▲고 향:달성 ▲혈액형:AB형
▲신 장:1백78cm ▲체 중:78kg
선거기간 내내 전직시장 출신 후보들의 집중포화를 맞았음에도 초반의 선두를 꿋꿋하게 유지, 초대 대구민선시장 자리에 오르게 된 문희갑, 그는 누구인가.
문당선자는 선거운동기간동안 만나는 사람들마다 허리를 숙여 손을 내미는데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평소 그가 얼마나 뻣뻣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아래에만 그런게 아니다. 위로도 자기생각에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아래보다도 더욱 뻣뻣해진다. 소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선거기간중 대구공항의 국제공항화에 반대하는 동구주민들의 항의방문을 받고도 "국제공항이 대구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는 필수조건"이라며 국제화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측근들은 이때 많은 우려를 했다고 한다.그런 그가 민선시장자리에 오르게 됐다. 유권자가 그의 뻣뻣함을 높이 산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중앙정부와의 관계에서나 지역 국회의원들과의만남에서 관선시장처럼 굽실대지않고 다소 뻣뻣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함부로 굽히지 않는 소신포에 대한 긍정평가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런 성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싹을 틔워왔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으로 있던 82년 그는 사상초유의 '동결'예산을 편성했다. 각 부처 장차관들의 반발은 거셌다. 그는 "어떻게 다 들어주느냐"고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그래서 붙은 별명이 '문핏대'다. 이런 특징은 대구사람들의 뻣뻣함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대구시로 편입된 달성군 화원읍 본리1동 인흥마을이다. 민속자료 3호인 남평문씨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한말 유명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수봉선생의 5형제 가운데 3남의 소생으로, 37년 6월9일생이다. 태어날 때만 해도 집안은 상당히 넉넉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그는 당시만 해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자장면을 먹을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가세는 그가 경북고 2년 때 기울기 시작했고 그는 학업에전념할 형편이 못 되었다. 때문에 경북고 출신으로는 드물게 국민대에 입학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공군장교로 입대한 그는 59년 12월 미국으로 군사유학을떠났고 대위로 예편했다. 67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경제기획원에서 10년간을 근무했으나 여기서도 그의 강직한 성격은 승진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에게 관운이 터진 것은 국방부로 옮기고 나서부터다.국방부 예산편성국장 시절 그는 국방예산 삭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모 장군으로부터 "당신은 총살감"이라는소리를 듣고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80년 국보위에 몸을 담았다. 그의 소신과 강직함이 신군부의 주축세력들의 눈에 들었다는 분석이다. 이후 실세들과의 '인연'이 바탕이 돼 5공,6공 경제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82년 기획원 예산실장으로 재직중에는 역사상 처음 맞는 흑자경제 시대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진출하고 88년 경제기획원 차관직을 맡았고 그해 다시 장관급으로 격상된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을 맡았다. 토지공개념,금융실명제등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하려는 자세때문에 재벌들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재벌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한다.
그가 일약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이번 선거에서 당선의 밑거름이 된 지명도를 높일수 있었던 계기는 90년 4·3 서갑보선이다. 사상 초유의 혼탁부정선거로 기록된 이 선거는 그에게 떼려야 뗄수 없는 꼬리표로 작용했다. 그는 "본의와는 다른 선택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딸만 셋을 두고 있다. 큰 딸 지영씨는 출가했고 둘째(지경)와 셋째(지원)는 회사원과 대학원생이다. 부인 정송자씨와는 사촌누이의 소개로 만나 7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지금도 정씨는 그때 받은 연애편지를 2백여통 간직하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TK를 제조·첨단 산업 지역으로"…李 청사진에 기대감도 들썩
민주 "김민석 흠집내기 도 넘었다…인사청문회법 개정 추진"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